'그레이 아나토미'는 내가 대학을 다니던 20대 초반부터 즐겨보는 의학 관련 '미드'(미국드라마)다. 그레이라는 여주인공이 갓 의대를 졸업하고 인턴에 들어가는 이야기가 시즌1인데, 벌써 그레이는 일반외과 전문의가 되었다. 의사이자 인간으로서 성장해가는 주인공과 동료들의 스토리는 의사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들이어서 상당히 재미있다. 미드는 대개 시즌제로 구성되기 때문에 이후에 관심이 시들해져있을 시청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 마지막 에피소드에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거나 반전을 예고하는 전략을 취한다. 그레이 아나토미에서도 시즌이 끝날 때쯤 큰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설정이 반복되곤 했다.
그 중 하나가 타 지역에 있는 병원에 가기 위해 의사들이 경비행기를 타고 이동을 하던 중 조난을 당하는 에피소드였다. 처음에는 시청자들의 관심을 유지시키기 위해 또 하나의 사고가 일어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다음 시즌에서 경비행기 조난에 대한 이야기는 사뭇 신선하게 전개되었다. 희생자 가족들과 생존자들은 비행기 제조사에서 제시한 거액의 보상금을 받고 합의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생존자들 중 일부는 합의하지 않고 비행기 제조 회사와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 이유는, 무고한 희생자들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잘못을 한 누군가는 책임을 지기 바랐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길고 긴 소송에서 피해자 측은 승소했다. 가장 먼저, 부실한 비행기를 납품한 제조업체의 과실이 인정되었고 병원장이 재정악화를 이유로 비용은 저렴하지만 안전성이 검증되지 않은 비행기 업체로 변경한 사실이 드러났다. 운이 없어서 일어난 것으로 치부할 수 있었던 사고였지만, 책임을 따져보기 시작하니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었던 원인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세월호 사건 역시 그레이 아나토미의 비행기 사고처럼 처음엔 우연으로 받아들여졌으나 일주일간의 행태를 보면, 이 역시도 운 없는 사고였다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고 책임을 다하지 못했던 우리 사회의 어두운 단면이 드러났다. 국민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 할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정부, 공정한 태도로 밝혀진 사실만을 보도해야하는 역할을 망각한 언론, 침몰 당시에 구조요청을 하고 승객들을 대피시킬 의무가 있음에도 먼저 탈출해버린 선장과 선원들. 우리는 일주일이 넘는 기간 동안 도처에서 자신의 책임으로부터 '탈출'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무기력감에 휩싸였다.
우리에게 세월호는 아픔이자 과제로 남을 것이다. 이 뼈아픈 사건에 대하여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한다. 법적인 책임을 따지고 벌을 내리는 것은 법정에서 이루어질 일이지만, 법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책임이 없다고 할 수는 없다. 흔히 정치권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면 '책임지고 사퇴한다'는 말을 하고 실제로 그렇게 자기 자리를 벗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때로는 옳은 선택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이 책임을 지는 올바른 방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책임을 지기에 앞서 이뤄져야 할 일은 자신의 역할을 인지하는 것이다. 나는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인데, 그것을 하지 못했으니 거기에 대해서 책임을 진다. 라고 해야 순서가 맞다. 그리고 그 '책임'을 어떤 방식으로 질 것인지를 고민해야한다. 사퇴를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말한 이유는, 자신이 자리를 떠남으로써 이미 벌어진 사건이 해결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물질적으로 책임을 질 수 없을 때는 사과라도 해야 할 것이고, 물질적인 보상을 해줘야 할 때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하지만 책임을 질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같은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는 데에 있다.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에 대한 답을 찾자면 다시 앞서 이야기한 내용의 반복이다. 어째서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였는가를 심도 있게 고찰하고 자신의 능력이 닿는데 까지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책임'을 다하는 모습일 것이다.
다시 그레이 아나토미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피해자 의사들은 승소해서 원래 제안 받았던 합의금보다 훨씬 더 큰 액수의 배상금을 받았다. 하지만 문제는, 병원이 보상금을 지불하느라 파산해버렸다는 사실이다. 사고의 피해자였던 의사들은 두둑한 보상금을 챙기고 책임 소재를 끝까지 캐물어 관련자들을 확실하게 처벌해 원래 목표를 달성했다. 그러나 자신들의 직장을 잃게 됐다. 피해자 의사들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의기투합해 자신들의 보상금을 모으고 부족한 돈은 자력으로 충당해서 병원을 인수한다. 그리고 재정압박을 이유로 병원 내의 안전을 해치는 구조조정 조치들을 모두 취소하고 본래 목적의 의료를 실현하기 위해 애쓰게 된다.
그들은 평생 놀고먹어도 될 만큼의 거액을 받았으므로, 병원을 그만둘 수도 있었을 것이고, 병원이 파산했으므로 다른 곳으로 취직을 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의사로서 자신의 역할을 명확히 인식하고 세상이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선택을 감행했다. 그러한 행동은 '책임을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예로 삼을 만하다.
사회가 복잡하고 다양해진 만큼 개인의 책임도 분산되었다. 세월호 사고는 아무리 분산된 책임이라 하더라도 결코 그 무게가 가벼운 것이 아님을 보여줬다. 직업의 특성상 의사들에게는 다른 어떤 직업보다 더 높은 도덕성과 책임의식이 요구된다.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책임을 진다'는 의미처럼 주어진 일을 성실히 잘 해내는 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의사들의 정당한 진료행위를 구조적으로 방해하는 요인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이를 수정하려는 노력이야말로 근본적인 의미에서 '책임'있는 행동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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