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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대통령 주치의로 두가지 청탁을 했다"

안창욱
발행날짜: 2006-03-24 12:29:39

허갑범 교수 회고록..."의약분업 연기 설득 못해 아쉽다"

"나는 대통령 주치의로 재임하는 동안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두 가지 청탁을 한 일이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 주치의를 지낸 허갑범 전 연세의대 교수가 최근 ‘하회탈, 미완성의 아름다움’이라는 회고록을 펴냈다.

허갑범 전 교수는 회고록에 김대중 대통령에게 ‘의약분업 연기’ ‘기초의학 전공자 병역특례’를 청탁한 사례도 담았다.

그는 "대통령 주치의가 되면 여러 사람으로부터 부탁을 받거나 청탁을 받는 일도 많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나는 한사람의 의사로서 대통령에 대한 책임만 잘 하면 되는 것이지 그 이외의 일에 관심을 두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다짐했다"고 운을 땠다.

그러나 그는 "나는 대통령 주치의로 재임하는 동안 김 대통령에게 두가지 청탁을 한 일이 있다. 이것은 누구의 부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소신에 따라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1999년 10월 당시 보건복지부장관이던 차홍봉 씨가 만나자는 전갈을 보내와 서울시내 모 호텔에서 당시 장석일 청와대 의무실장, 복지부 담당국장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차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이 후보로 출마하면서 의약분업제도를 실시한다는 공약이 있었다면서 자신도 의약분업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국민 건강을 위해 반드시 시행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는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아마도 차 장관은 대통령을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모시는 나와 의무실장이 의사이기 때문에 혹시라도 의약분업 시행에 반대해 대통령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지 않을까 우려해 이렇게 만나서 설득하려고 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그는 "나는 차 장관에게 의약분업의 좋은 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서구 선진국들은 이미 다 되어 있고, 일본도 그 방향으로 가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준비조차 안 되고, 의료계나 국민들로부터 합의도 받아내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한다고 제대로 되겠느냐고 조심스레 의견을 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차 장관은 1994년에 이미 하기로 예고된 것이라고 고집했다는 것이 허 전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정부가 2000년 의약분업 시행하자 의료계가 집단파업에 들어가고, 전국의대교수협의회가 집단 사직하는 사태가 이어질 무렵 비서실을 통해 김대중 대통령 특별면담을 요구했고, 단독으로 면담할 수 있었다고 했다.

허 전 교수는 "의료계 일각에서도 도대체 의사의 한 사람으로서 대통령을 가까이 모시면서 대통령을 설득하고 관계 장관 및 공무원들에게 의약분업이 잘못됐다는 이야기를 해야지 왜 가만히 있느냐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던 터였다"고 당시 상황을 소개했다.

그는 "이날 40분간 독대하면서 우리나라의 의료현실과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채 강행되고 있는 의약분업의 문제점에 대해 간곡하게 말씀드렸다"며 "웬만하면 일본처럼 좀 더 준비를 하고 임의분업을 해서 국민들의 불편 등 문제점을 해결한 후에 전면적으로 실시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게 요지였다"고 적었다.

그는 대통령 독대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대통령은 의약분업이 문제가 없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수순까지 멀리 나간 상태에 이르렀다고 말씀했다. 대통령은 이미 선거공약의 하나로 오랫동안 측근들을 통해 연구해왔고, 국민들과 약속한 일이기 때문에 시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누차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참으로 아쉬운 순간 이었다."

그는 "많은 동료 의사들은 내게 대통령 주치의를 하면서 의약분업을 둘러싼 이 엄청난 사태에 대해 같은 의사의 입장에서 좀 도와줄 수 있었지 않느냐고 아쉬움을 표한다. 대통령의 입장을 바꾸지 못한 것은 지금도 몹시 아쉬운 부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어 그는 "나는 연세의대 학장을 하면서 만약 기초의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3년간의 병역을 면제해 계속해서 연구할 기회를 준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기초의학을 지원하게 되고 의학의 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며 대통령께 병역특례를 청탁(?)한 배경을 기술했다.

그는 "나는 대통령과 면담하면서 이 문제를 말씀드렸다. 이런 이야기를 잘못 했다가 어디서 청탁을 받은 것이 아닌가, 대통령에게나 주변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여간 조심스런 일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김 대통령은 내 말을 경청한 후 그렇다면 의사단체의 건의문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대통령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생각한 나는 부랴부랴 당시 의사협회 한광수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래서 관련된 7개 단체장이 조선호텔에서 조찬회를 갖고 이 문제를 논의하게 됐다"고 밝혔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의협회장을 포함해 7개 단체장이 서명한 건의문을 받아 2001년 7월 청남대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고 있던 김 전 대통령에게 직접 전달했다고 한다.

그는 "대통령은 이 건의문을 자세히 읽어 보시고 ‘아, 이것은 해야겠군’하며 혼잣말처럼 되뇌었다”며 “김 대통령은 건의문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영환 과기부장관을 청와대로 불러 의생명과학 관련 연구자들을 육성하기 위해 이들에게 병역특례를 주는 것을 적극 추진하라고 직접 지시했다"며 감회에 젖었다.

허갑범 전 교수는 "의생명과학 육성을 위해 병역면제의 특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추진해온 나의 염원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다시 한번 김대중 대통령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고 말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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