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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는 동안 불편하지는 않으셨어요

김혜인
발행날짜: 2014-05-09 06:00:01

연세대 의전원 4학년 김혜인 씨

"클리닉 자주 받으러 오세요?" 사물의 형상이 제대로 보이지 않도록 눈 위에 헝겊을 얹어준 직원이 내게 물었다. "아니요, 처음이에요." 라고 내가 대답하자 직원은 전혀 들떠있지 않은 나의 목소리가 다소 민망했는지, 아니면 더 이상 할말이 없었는지 대화를 이어가지 않고 조용히 머리를 감겨주었다.

당장 며칠 뒤에 졸업사진을 찍을 예정이었다. 머리의 윤기가 얼마나 영향을 끼치겠냐 만은 나는 머리에 돈을 바르러 미용실에 가보았다. 후에 좋은 인연을 알선시켜주는 분에게 이 사진이 들어있는 앨범이 전해질 수도 있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던 터라 가볍게 넘길 수는 없었다. 여전히 그 비싼 미용실 특유의 친절함은 낯설었다. "손님은 스트레스 받을 때 어떻게 해소하세요?" 내 머리에 무언가를 바르고 있던 직원이 말했다. 한참이나 침묵이 이어지다가 갑자기 물어와서 무슨 대답을 할지 생각은 나지 않았다. 대신 이 직원이 정말로 궁금해서 내게 물은 건지 반대로 궁금해졌다.

나도 상대방의 대답이 별로 중요하지 않은, 대화의 레퍼토리로 정해놓은 대사가 있기 때문이다. "오시는 동안 불편하지는 않으셨어요?"나 "더운데 오래 기다리느라 힘드셨죠?"라고 정해져 있는 나의 CPX 시작 질문이다. 처음 CPX를 준비하기 위해 체크리스트와 관련 책자를 꺼내 펴보았을 때 조금은 생소했다. 내가 다소 무뚝뚝한 편이라 그런 건지 예시로 들어준 저런 말은 익숙하지 않았다.

매년 항목을 늘려가며 현재는 50개를 넘어가는 CPX 항목들의 시작은 신기하게도 모두 자기소개와 저 두 개의 문장이었다. 그리고 부가설명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PPI, patient physician interaction. 그러니까 54개 모든 항목에서 PPI는 공통적인 평가 기준이라는 것이다. 실습을 돌면서 때때로 환자를 배정받아 병력청취나 간단한 신체진찰 등은 해볼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의대생에게 CPX는 한 (모의) 환자의 모든 것을 담당하는 주치의가 되는 첫 번째 경험이나 다름 없다. 당연히 PPI의 physician이 되는 것도 첫 번째 경험이다.

CPX 한 항목당 제한된 10분이라는 시간은 사실 새 학기 같은 반 학생을 만나 자기소개 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다. 이 짧은 시간은 5분 병력 청취, 3분 신체 진찰, 2분 환자 교육으로 나누어 사용하라고 권장된다. 환자의 증상에 대한 얘기와 진찰로도 모자랄 10분 동안 PPI를 실제와 똑같이 형성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너나할것없이 대부분 의대생이 사용하는 문장, "오시는 동안 불편하지는 않으셨어요?"가 있는 것이다.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궁금하지 않은 편이다. 매번 말할 때마다 자동화된 것 마냥 말하곤 한다. 아무리 CPX를 친구들과 연습을 해도 진심을 담기란 쉽지 않은 것 같다.

대신 나는 정말 아파 보이는 (연기를 하시는 모의) 환자에게 "정말 아프실 텐데 오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제가 빨리 진찰해드릴게요."라는 말이나 "환자분이 정말 괴로우셨을 것 같아요. 제가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라는 말은 잘 하는 편이다. 그래도 100% 진심은 아니고 조금 많이 PPI를 염두에 둔 발언이라는 것은 비밀이다.

무엇이 먼저인지는 잘 모르겠다. CPX의 PPI 항목이 학생들에게 연습을 통해 대사를 먼저 체화하여 마음에 닿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마음으로 먼저 이해하고 대사가 아닌 자신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인지. 어느 쪽이든 그 의도는 분명한 것 같다. "쉽게 멍이 들어" 내원한 환자도, "어지러워" 내원한 환자도. 의대생의 시험에서는 소위 "깔고 들어가야 하는" 점수이고, 의사의 가장 기본이라는 것이다.

본과 4학년이다 보니 CPX 모의시험도 몇 번 예정되어 있고 친구들과 예행연습도 여러 번 할 것이다. 이제는 너무나 당연하게 노크한 후 자기소개, 그리고 "오시는 동안 불편하지는 않으셨어요?"라고 물어보고 있다. 본과 3학년 실습기간 동안 몇몇 과에서 CPX 해당 항목의 시험을 보기 위해 여러 번 연습을 했기 때문이다. 아마 실제 실기시험을 보러 가서 긴장한 상황에서도 자동으로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체화되었을 테니 이제는 남은 기간동안 대화의 레퍼토리가 아닐 수 있도록 마음을 얹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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