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벼르던 스페인을 다녀왔다. 아내와 함께 하는 두 번째 여행이다. 환갑이 되어서야 아내와 함께 비행기를 타게 되었으니 참 무심한 남편이다. 육십갑자를 한 바퀴 돌고나서야 삶의 틀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으니 아무래도 생각이 늦게 여무는 타입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년을 살아냈으니 감사하고도 감사할 일이다. ‘남편과 아내 사이에는 우정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것 같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대로 지나간 세월이 약이 된 셈이 아닐까 싶다.
대니얼 클라인은 오래 지속된 부부관계가 노년에 가장 큰 위안이 된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부부가 공유하는 추억이 늘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개미 쳇바퀴 돌 듯 하는 일상에서 공유할 수 있는 추억이란 것이 별다를 게 없을 것이다. 마침 올 봄에 처음으로 베트남의 하롱베이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를 같이 다녀오면서, 여행이라는 특별한 추억을 만들면 나중에라도 주고받을 이야깃거리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에 여행을 이어가기로 하였다.
아내와 함께 하는 해외여행지로 스페인을 고른 것은 <꽃보다 할배>의 영향보다도, 다녀온 사람들의 좋은 평가가 한 몫을 했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의미를 둔다면 이베리아반도를 둘러싸고 벌어진 아랍문명과 기독교문명의 충돌이 남긴 문화적 유산을 볼 수 있다는 점에 끌렸다. 또한 언젠가는 아내와 함께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어보기 위해서라도 스페인이라는 나라를 느껴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평생 동안 내가 간직했던 가장 큰 욕망들 가운데 하나는 여행이어서 미지의 나라들을 보고 만지며, 미지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지구를 돌면서 새로운 땅과 바다와 사람들을 보고 굶주린 듯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든 사물을 보고, 천천히 오랫동안 시선을 던진 다음에 눈을 감고서 그 풍요함이 저마다 조용히, 아니면 태풍처럼 내 마음속에서 침전하다가 마침내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고운 채로 걸러지게 하고, 모든 기쁨과 슬픔으로부터 본체를 짜내고 싶었다.”라고 했다지만, 필자의 경우 카잔차키스와 같은 고차원의 여행은 아니더라도 관광 수준은 넘어서고 싶었다.
여행과 관광의 차이점을 정리할 필요가 있겠다. 체스터튼은 1920년에 ‘여행자는 현재 보이는 것을 보는 반면에 관광객은 보러 온 것을 본다.’라고 했고, 다니엘 부어스틴은 1961년에 ‘여행자는 능동적이었다. 집요하게 사람과 모험과 경험을 추구했다.
반면에 관광객은 수동적이다.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나주길 기대할 뿐이다.’라고 뜬구름 잡는 것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반면에 롤프 포츠의 개념 정리는 손에 잡히는 것처럼 분명하다. “여행하면서 ‘그냥 보는 것’과 ‘이해하면서 보는 것’의 차이는 관광객(tourist)과 여행자(traveler)의 차이로 자주 설명된다. 이런 구분에 따르면 여행자는 주변 환경을 사실대로 보는 사람인 반면 관광객은 볼거리만 피상적으로 훑어보는 사람이다. 게다가 관광객은 깊이와 멋이 부족하다고 여겨지며, 그들의 행위에는 진정성이나 인간미가 없다고 손가락질 받는다. 한편 여행자에게서는 열정과 진심이 있어 정반대로 여겨진다.”
적어도 관광객의 수준은 넘어서야겠다는 생각에 나름대로 스페인 여행의 일정에 맞는 자료들을 챙겨보았다. 기본적인 여행안내서로는 <저스트 고, 유럽(최철호 지음, 시공사 펴냄)>을 참고했고, 여행일정에 건축물이 많은 점을 고려하여 <스페인은 건축이다(김희곤 지음, 오부제 펴냄)>와 <스페인은 가우디다(김희곤 지음)>를 골랐으며, 미술에 관해서는 <스페인 미술관 산책(최경화 지음, 시공아트 펴냄)>의 도움을 받았다. 그밖에도 콘수에그라 풍차마을에도 간다고 해서 <돈키호테(미겔 데 세르반테스 지음, 시공사 펴냄)>도 읽어보았다. 여행은 준비한 만큼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존 스타인벡은 ‘오래 두고 여행을 계획하노라면 마음속으로 어쩐지 그 여행이 실행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 나는 떠나가고 싶지 않았다. 꼭 무슨 일이 생겨서 내가 못 가게 되어야만 할 것 같았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다.’라고 했다. 사실 우리의 여행도 그랬다. 처음에는 9월 23일부터 10월 4일까지로 날짜를 정하고 업무를 정리하고 있었는데, 어머님께서 돌아가시는 등 집안에 여러 사건들이 생기는 바람에 출발이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스타인벡과는 달리 가야겠다는 의지가 더 강했던지 10월 7일부터 19일까지 날짜를 새로 잡고 그 일정은 물론 좋은 상품이라고 입소문을 듣고 있던 <참좋은 여행사>의 스페인-포르투갈-모로코 여행상품을 예약하였고, 결국은 출발하기에 이르렀다. ‘여행은 홀로 하는 것이다.’라고 말한 안도 다다오는 20대의 여행경험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고 했다. 젊어서 하는 여행은 기회를 찾기 위한 도전이라면 나이가 들어서 하는 여행은 아무래도 느낌을 찾는데 목표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젊어서는 자유여행을 나이가 들어서는 단체여행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 여행사 상품을 선택한 이유이다.
결론을 미리 이야기하면, 이보다 더 좋은 선택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해외여행의 성패는 현지가이드와 인솔자의 지원노력으로 결정되는데, 조형진가이드와 이봄 인솔자의 환상적인 팀워크는 이번 여행을 최고의 여행으로 만들었다. 특히 조형진 가이드는 이베리아 반도를 둘러싸고 전개된 문명의 충돌사를 유럽과 아랍은 물론 멀리 중국에 이르기까지 요약하여 설명해주었을 뿐 만 아니라 건축이면 건축, 미술이면 미술 등 해당분야의 전문가를 뺨치는 설명으로 앎의 지평을 넓혀주었다. 이봄 인솔자 역시 숙소는 물론 입출국에 관한 제반사항을 꼼꼼히 챙겨 불편함을 느낄 수 없었다. 지면을 빌어 두 사람에게 다시 감사드린다. 이들의 활약상은 이야기 중에 자주 등장하게 될 것이다.
에노모토 히로아키는 ‘여행을 가면 어떤 경로로 어디를 돌아보았는지 꼼꼼히 기록하면 나중에 읽어도 당시의 일이 선명하게 떠올라 추억에 잠길 수 있고 그때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런데 메모가 귀찮아 뒤로 미루게 되면 결국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 혼란이 오게 되다고 했다. 필자는 과거에 출장을 다닐 때 무거운 노트북을 들고 다녔다. 현지에서 발표할 내용을 반복해서 익히거나 수정이 필요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들고간 노트북에 수시로 여행 중에 느낀 점을 기록할 수 있는 덤을 얻었다.
하지만 여행에 노트북을 들고 가는 것은 아무래도 짐이 될 것 같아 지난번 여행에서는 메모장에 요약하였다가 집에 돌아와 여행기를 정리하였다. 이번에는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서 수시로 워드작업을 할 수 있었다. 보고 들은 느낌을 바로 글로 남길 수 있을 뿐 아니라 편집도 가능하여 원고지 300매 분량의 초고를 남길 수 있었다. 그 초고를 바탕으로 스페인과 모로코 그리고 포르투갈로 여러분을 안내하려고 한다.
이번에 방문한 장소는 모두 열아홉 곳이다. 비행기를 갈아탄 도하까지 치면 스무 곳이다.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처럼 큰 도시도 있지만 유럽 서쪽의 땅 끝 마을 까보다로까처럼 사람구경하기 어려운 곳도 있다. 본대로 들은대로 여러분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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