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12일차. 드디어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전날 프라도 미술관 구경을 마치고 ‘한강’이라는 이름의 한식당에서 먹은 순두부에 오징어볶음이 나온 저녁식사가 참 맛있었다. 일찍 숙소에 들어온 것은 귀국준비를 위한 배려일 터이다. 짐을 정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11시 무렵 체크인을 한 이국의 가족 가운데 한 꼬마아이가 복도를 오가면서 떠드는 바람에 잠이 깼다. 문제는 이 꼬마가 오랫동안 떠들고 다니는 바람에 달아난 잠이 돌아오지 않아 고생했다는 점이다. 나가서 야단을 칠 수도 없고… 참 그랬다.
6시 반에 모닝콜을 받고서 겨우 잠을 깼지만 샤워를 하면서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휭 하는 느낌이 들었다. 빠듯한 일정을 강행군하다 보니 피로가 누적된 데다가 전날 밤 잠자리를 설친 탓이다. 그래도 마지막 날까지 잘 버틴 셈이다. 아내 역시 많이 힘든 눈치가 아니어서 참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면도를 하면서 보니 얼굴이 많이 탔다. 흐렸다고는 하지만 스페인 그리고 모로코의 따가운 햇볕에 무방비 상태로 다녔기 때문이다.
이날 일정은 마요르광장을 시작으로 솔광장으로 이동하여 마드리드에서 제일 번화한 거리인 그란비아 대로를 거쳐 스페인광장에서 끝이 난다. 김희곤교수가 <스페인은 건축이다>에서 소개한 역순으로 이동하는 셈이다. 김희곤교수는 “광장은 그리스, 로마, 중세이슬람을 거치면서 신전과 교회의 마당에서 점차 인간의 마당으로 발전되었다. (…) 교회가 신의 지혜를 배우는 학교라면 작은 광장은 신과 인간이 몸과 가슴으로 소통하는 공간이다.”라고 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에서 시민들이 모여 다양한 활동을 하는 집회장으로 쓰인 야외 공간’이라고 설명하는 아고라(agora)가 오늘날의 광장이라고 한다면, 초기 그리스 시대(기원전 900년 ~ 700년경)에 시민으로 분류되던 자유민 남성들이 국방의 의무를 위하여, 혹은 왕이나 의회로부터 통치에 관한 발언을 듣기 위하여 모이던 장소이며, 또 상인들이 물건을 팔기 위하여 콜로네이드 아래에서 노점 혹은 상점을 열던 장소인 아고라는 신의 공간이기 이전에 이미 인간들의 공간이었던 셈이다. 따라서 광장은 원래 인간의 것으로 되돌려진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8시 반에 숙소를 떠난 버스가 처음 선 장소는 마요르광장이다. 주말 이른 시간이라서인지 광장은 아직 깨어나지 않고 있었다. 가로 122미터, 세로 94미터의 장방형의 광장을 4층으로 된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다. 김희곤교수는 “마요르광장은 도시의 밀림 속에 숨어 있는 장엄한 오아시스”라고 비유했다. 중세의 마드리드의 숲으로 가려진 은밀한 공간으로 마드리드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주는 시원적 우물이라는 것이다.
이곳은 중세시대부터 상인들이 모여 살며 물건을 팔던 곳으로 펠리페3세가 주도하는 행사가 열리던 마드리드의 중심부였다. 1598년 착공하여 1621년 완공된 이후 19세기까지 매일 시장이 열렸고, 투우, 종교재판, 공연, 축제가 이어진 정치와 축제의 공간이었다. 지금도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모든 축제는 마요르 광장에서 시작된다고 한다.
광장을 둘러싼 1층에는 주로 카페와 주점 그리고 관광상품의 매장이 들어 있고, 2층부터는 주거공간이라고 한다. 광장은 모두 9개의 아치로 된 출입문을 통하여 외부와 연결이 된다. 그 가운데 산 미겔 시장 쪽에 있는 출입문에 대하여 김희곤 교수는 “빛의 수도원 마요르 광장으로 통하는 9개 통로 중 하나로, 은밀하게 통제된 중세의 숲으로 난 출입구는 세상으로 향하는 통로”였다고 설명한다.
아내와 나는 이 계단을 내려가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다는 식당 보틴까지 가보았다. 이른 시간이라서 식당은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고 있었다. 발걸음을 돌려 광장밖에 있는 산미겔시장을 찾았다. 깔끔한 수퍼마켓 같은 모습으로 번잡하고 시끄러운 우리네 전통시장 같은 분위기는 없었다. 마요르광장이 깨어나며 독특한 모습을 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삐에로 복장에 익살을 피우는 아저씨, 미니마우스 북장에 애교를 피우는 아가씨(?)가 나타나 관광객들에게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한다. 사진을 찍고 나면 물론 어느 정도의 사례를 당당히 욕구하는데, 하는 양을 보면 나름 프로의식을 가지고 있다.
마요르광장을 나와 조금 걷다보니 열린 공간이 나온다. 정식명칭이 푸에르타 델 솔(Puerta del Sol), 태양의 문이다. 16세기까지만 해도 태양의 모습을 새긴 중세시대의 성문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헤아려 보니 모두 9개의 도로가 솔광장으로 연결되고 있다. 솔광장은 스페인 도로의 원점이다. 즉 마드리드를 출발해서 스페인 각지로 흩어지는 도로들이 솔광장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도로들은 우산살처럼 타원형으로 확장되는 환상(環狀)의 도로들을 엮고 있다. 마드리드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스페인 각지에서 들어오는 도로들이 환상의 도로를 엮으면서 솔광장에 모여드는 모습이 마치 거미줄처럼 보인다고 한다. 그렇다면 솔광장은 거미가 진을 치고 있는 거미줄의 중심이 된다. 솔광장은 마드리드의 배꼽인 셈이다. 1768년 광장 남쪽에 중앙우체국이 완공되면서 해외나 지방에서 오는 전령들이 이곳으로 모이게 되었고, 새로운 소식에 궁금한 사람들이 솔광장으로 모였다고 한다. 1962년부터는 시민들이 솔광장에 모여 새해를 맞는 모습을 텔레비전 방송으로 생중계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고 한다.
마요르광장 쪽에서 솔광장으로 들어서면 카를로스3세의 기마동상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전날 찾았던 프라도미술관이 있게 한 스페인의 왕이다. 그리고 광장의 동쪽 끝으로 가면 딸기나무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는 모습의 곰동상을 볼 수 있다. 곰은 마드리드의 상징이다. 곰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데, 젊은 청년들이 여럿 몰려온다. 그런데 그들 중 한 사람이 다가와 단체사진을 찍어 달라고 했다. 사실 외국에서 카메라를 맡기면서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가 카메라를 들고 달아날까 무서워서 셀카봉까지 만들어냈다고 들었다. 그런데 고가의 갤럭시폰을 맡기는 의외의 상황이다. 필자가 갤럭시폰을 들고 달아날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젊은이가 건네주는 최신형 갤럭시폰을 받아들고 구도를 잡으려는 순간 폰을 놓쳤다. 폰을 떨어뜨린 필자는 물론 필자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얼어붙었다. 시간이 멈추는 순간이다. 물론 카메라의 주인이 제일 놀랐을 것이다. 천만 다행으로 필자가 순발력을 발휘해서 떨어지는 폰을 무사히 받아낼 수 있어 여러 사람들을 다시 놀라게 만들었다.
곰동상을 지나 프레시아도스 몰을 거쳐 그란비아 대로를 걸어서 스페인광장까지 걸어갔다. 그란비아 대로에서 스페인광장으로 접근하면 돈키호테 기념비의 뒤쪽에 있는 분수대를 먼저 만나게 된다. 분수대를 감싸고 의자들이 놓여있어 사람들이 쉬기도 하고, 연인들은 사랑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세르반테스의 모습을 새긴 조각이 포함된 기념비를 배경으로 로시난테를 타고 있는 돈키호테와 그의 뒤를 따르는 산초 판사의 청동상이 있고, 좌우로는 알돈사 로렌조, 즉 토소보의 둘시네아 공주의 모습을 새긴 석상이 있다. 기념비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1953년에 세워진 117m 높이의 스페인 빌딩이며, 기념비 왼쪽에 서 있는 건물은 1957년에 세운 마드리드타워이다.
11시 15분 드디어 모든 일정을 마치고 스페인광장 근처에 있는 엘레강스한 분위기의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점심메뉴는 대구요리인데 간도 알맞고 양념도 좋았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은 것이다. 식사가 끝나고 9일이라는 긴 시간을 같이하면서 일행을 안내해온 조형진가이드 그리고 황희남 가이드 시보와 아쉬운 작별을 나누었다. 조형진 가이드와는 작별로 끝이 아니었다. 조 가이드는 필자가 빠트린 기억의 빈공간을 채워 여행기가 완성될 수 있도록 애프터 서비스까지 완벽하게 해주었다. 다시 감사를 드린다.
우리는 다시 이봄씨의 인솔로 공항에 도착해서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마드리드를 떠날 수 있었다. 어느 팀인가는 공항 가는 길에 버스가 고장 나는 바람에 애를 먹기도 했다는 것이다. 자정 무렵에 도착한 카타르 도하는 불빛이 휘황하여 여기가 과연 사막 위에 건설된 도시가 맞을까 싶다. 잠시 머물다가 정시에 인천행 비행기로 갈아타고 파키스탄을 거쳐 히말라야를 넘고 중국을 지나 인천까지 무사히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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