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를 떠나 본토로 돌아오면서 헤르만 헤세가 베네치아를 여행하고 남긴 글이 떠오른다. "베네치아로의 여행만큼 긴장되는 경우도 없다. 기차가 물의 도시로 들어가노라면 도시가 물로부터 서서히 솟아오른다."(1)
그렇다면 떠나면서 뒤돌아보는 베네치아는 서서히 물로 가라앉고 있을 것이다. 헨리 제임스가 베네치아를 변덕스러운 여인에 비유한 까닭을 알려면 한나절 머물러서는 안 될 일이다. 돌아온다는 약속을 하지는 못했지만, 이탈리아를 따로 여행할 기회가 있을 것이고, 그때 베네치아를 다시 찾아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쉬움을 달랜다.
구경을 잘 했으니 밥을 먹을 차례다. 수상택시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식당으로 이동했다. 밀라노로 가는 길에 있는 한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이번 발칸여행길에서 처음 먹게 된 한식이다. 한국에서 먹는 비빔밥에 들어가는 재료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맛은 훌륭했다. 아마도 장맛 때문이 아닐까?
발칸지역에 한국관광객이 늘고 있다니 특히 두브로부니크 정도라면 한식당을 열어도 괜찮을 듯하다. 점심을 잘 먹고 나니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여유 있게 점심식사를 마치고 2시 무렵에 밀라노로 떠난 일행은 6시를 조금 넘겨 밀라노 말펜사공항에 도착했다. 밀라노 외곽에서 잠시 퇴근길 정체를 만났지만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았다.
수년 전에 밀라노와 베네치아의 중간에 있는 스트레사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학회 중간에 짬을 낼 수 있었는데, 일행 가운데 일부는 기차를 타고 베네치아로 가고, 필자 일행은 밀라노를 구경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베네치아를 보았더라면 이번 여행에서 많은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물론 밀라노 역시 언젠가는 아내와 함께 갈 기회가 있을 것이고 그때는 좋은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말펜사공항은 그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다. 발권수속을 마친 다음에 보안검색을 거치면 바로 면세점 구역이 나오고, 게이트로 들어가기 전에 출국심사를 하게 돼 있다. 보통은 보안검색 후에 바로 출국심사를 하는 공항들이 대부분인 것과는 다른 점이다. 따로 살 것도 없고 해서 면세점을 지나쳐 바로 출국심사를 받고 게이트로 이동했다. 그리고는 베네치아를 출발하면서 읽기 시작한 슬라보예 지젝의 '매트릭스로 철학하기'를 마저 읽었다.
필진 가운데 한 사람인 슬라보예 지젝이 슬로베니아출신인 점을 고려하여 고른 책이다. 발칸여행을 떠나면서 여행지와 여행기간 그리도 이동거리 등을 고려해서 5권을 골랐다. 마크 마조워의 '발칸의역사', 이종헌의 '낭만의 길 야만의 길', 카트린 지타의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슬라보예 지젝 등의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그리고 스반테 페보의 '잃어버린 게놈을 찾아서' 등이었다. 나름대로는 이번 발칸여행과 관련된 내용을 읽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여행에 들고 간 책을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마칠 수 있었던 것도 처음이었다. 그만큼 창밖의 풍경에 무심했던가 싶다.
저녁 10시에 예정되었던 비행기는 정시에 이륙했다. 비행기를 오래 타야 하는 경우 창문 쪽 좌석을 피하는 것은 화장실을 다녀와야 할 때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앉는 경우도 있다. 비행기가 높이 날기 때문에 달리 볼거리는 없지만, 그래도 출발할 때나 내릴 무렵에는 이국적인 대지의 풍경을 감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야간비행에서는 그마저도 어둠 속에 묻히고 불빛만 위안이 되기도 한다. 대도시 부근에서는 휘황찬란한 불빛쇼를 감상할 수도 있지만,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곳을 지날라치면 외롭게 흩어져 있는 불빛이 가냘프게 깜박이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야간에 단독비행을 하곤 했던 생텍쥐페리는 그 불빛의 의미를 남다르게 느꼈던가 보다. "이 어둠의 망망대해에서 반짝이고 있는 모든 불빛들은 하나하나가 그 나름대로의 뜻과 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떤 집안의 불빛은 책을 읽기 위해서 그렇게 켜져 있었고, 다른 집안에서는 공간을 측정하기 위해서, 또 안드로메다 성운을 열심히 관찰해보기 위해서 켜져 있기도 했다. 그 모든 불빛 속에서 사람들은 사랑을 속삭였을 것이다."(2)
어둠을 홀로 지키고 있다 보면 생각이 날개를 달고 무한하게 날아오르기 마련이다. 생텍쥐페리는 그런 생각들로 매듭을 지어 만들어낸 영롱한 구슬들을 꿰어 작품을 써냈을 것이다.
책을 모두 읽은 탓에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할 일이라고는 영화를 감상하는 일밖에 없었다. 추억의 명화 '카사블랑카'가 기억에 남는다. 40여년 전에 명화극장에서 본 탓에 기억이 가물거렸는데 이번에 제대로 기억을 강화한 셈이다.
여행은 집으로 돌아가 문을 여는 순간 마무리되는 법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말라는 뜻이다. 인천공항에는 공항버스가 서는 정류장이 두 곳이다. 당연히 첫 번째 서는 곳으로 갔어야 하는데, 이날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두 번째 서는 곳으로 가는 바람에 버스 한 대는 좌석이 없어 보내야 했고, 한참을 기다려 온 버스도 겨우 끝자리를 얻어 탈 수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서울로 오는 길에 보는 우리 산하에는 가을빛이 완연하다. 역시 가을 분위기는 우리나라가 최고다.
여행을 정리해보면 급하게 결정을 하는 바람에 놓치면 섭섭한 장소, 예를 들면 사라예보, 베오그라드, 류블라냐 등이 빠졌다. 이번 여행상품은 크로아티아의 작은 도시들을 엮다보니 떨어져 있는 대도시들을 끼워 맞출 수 없었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세르비아 등 5개국을 포함하는 상품은 대도시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마지막까지 고민하게 만들었는데, 특히 아드리아해안을 따라서 흩어져 있는 고대 로마시대의 유적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 끌려서 선택했던 것이고, 일정을 잘 맞추지 못해서 여유 있게 돌아보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발칸을 사이에 두고 오랫동안 겨루던 오스만제국, 베네치아 그리고 오스트리아는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모두 힘이 쇠잔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문명이 접하면서 영향을 주고받았으니 남겨둔 것들이 많았던 것 같다. 시작할 때 구상했던 것보다는 정리할 내용들이 많았던 까닭에 연재가 길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다루어지지 않은 것들도 있을 것이다. 발칸지역의 문학작품들로는 우리에게 소개된 것이 많지 않을뿐더러 필자가 과문한 탓에 충분히 소개하지 못한 점을 송구하게 생각한다.
오늘로써 발칸여행기를 마무리하고, 한 주일 정도의 여유를 둔 다음에는 지난 1월에 다녀온 남미여행기를 이어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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