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증원을 둘러싼 의정갈등이 7개월 이상 장기화되면서, 각 병원이 추진 중인 분원설립 사업에 줄줄이 '빨간 불'이 켜지고 있다.
29일 정부 및 병원계 복수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해 대형병원을 중심으로 분원 설립 바람이 불며 수도권에는 6600병상이 추가로 공급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고금리 기조에 원자재 값 및 인건비 상승, 의정갈등 장기화 등 악재가 겹치며 병원들은 하나둘 사업 포기를 선언하는 실정이다.
■ 한양대안산병원 예타조사 부정적 결과…"공사비 폭등에 의정갈등, 설상가상"
우선, 경기도 안산시에 추진하던 한양대병원 신축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다.
한양대병원은 지난달 30일 '한양대학교 종합병원 유치를 위한 안산시-한양대 예비 타당성 조사 공동용역' 중간보고회를 개최할 예정이었으나 지연돼 30일 열린다.
한양대 안산병원은 최소 234병상에서 최대 492병상 규모로 필요 병상수를 예측하고 있으며, 예상사업비는 300병상(3611억원), 500병상(5860억 원) 규모로 추산하고 있다.
하지만 예비타당성조사 시나리오 분석 결과, 안산시 장래인구 예측에 따른 필요 병상수 도출과 현시점에서 부동산 PF 및 의료계 시장악화 및 한양학원재단의 재정악화 등 대내외적 여건을 고려했을 때 병원 신축은 타당하지 않다는 방향으로 결론이 난 것으로 알려졌다.
안산시 관계자는 "지난 4~5년 전에 비해 공사비와 인건비 등이 너무 치솟아 병상 당 단가를 따져보면 차이가 굉장히 클 뿐 아니라 최근 정부와 의료계 갈등이 길어지며 더욱 상황이 좋지 않다"며 "중간용역 결과 사실 시나리오가 좋지 않은 쪽으로 도출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아직 중간보고이기 때문에 당장 분원 신축 사업이 무산되는 것은 아니다"라며 "다만, 최종 용역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얼마나 큰 변화가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인하대병원 역시 김포시 풍무동 일대에 700병상에 달하는 '김포인하대병원'을 2027년까지 건립할 예정이었으나 진행 속도가 매우 더딘 실정이다.
공사비 분담을 둘러싼 김포도시관리공사와 갈등이 장기화되고 있기 때문. 병원 측은 관계자 협상을 통해 지속적으로 논의를 진행 중이라는 입장이지만 별다른 진전이 없어, 일각에서는 '사실상 무산'이라는 시각이 나오고 있다.
가천대 길의료재단, 호반건설, 미래에셋증권 등이 컨소시엄을 이뤄 추진하던 '위례신도시 대규모 의료복합타운 사업'은 이미 무산됐다.
사업 부지 매입용 중도금을 납부하기 위해 토지대금(브리지론) 조달에 나섰는데 프로젝트 파이낸싱(PF) 시장 악화와 의료 공백 등으로 대출 모집이 최종 성사되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이들은 중도금을 납부하지 못하며 사업이 백지화됐다.
사업을 재개하려면 위례 의료복합타운 조성을 추진한 SH공사가 다시 사업자를 선정해 부지를 재매각해야 하지만, 의정갈등의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 속 새로운 적임자를 찾아 나서기 쉽지 않은 실정이다.
익명을 요구한 분원 추진에 위기를 겪고 있는 병원 관계자는 "병원 주요사업이었는데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 안타깝다"고 전했다.
이어 "다만, 분원사업과 관련된 예산 등은 이미 과거부터 예정됐었고 지자체 등과 협업해서 함께 진행한다"며 "이번 의정갈등의 영향은 크지 않았다고 본다"고 말했다.
■ 청라아산병원 건축계획안 조건부 통과…"연내 착공 총력 다한다"
반면, 이미 착공에 들어갔거나 곧 시작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병원들도 있다.
아산사회복지재단이 인천 청라에 건립을 추진 중인 '서울아산청라병원'은 최근 인천경제자유구역청 대회의실에서 열린 건축계획 신규심의안에서 조건부 통과에 성공했다.
청라아산병원이 완공되면 ▲800병상 규모의 첨단 의료센터 ▲카이스트와 하버드MGH(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 연구소 ▲시니어를 위한 헬스케어Zone ▲해외 환자를 위한 메디텔과 생활편의시설 등이 들어설 예정이다.
더불어민주당 이용우 의원(인천 서구을)은 "청라아산병원은 KT&G, 우미건설, 하나은행, 현대산업개발 등 신용등급이 높은 기업이 컨소시엄으로 구축됐다"며 "현재 자본금으로 1980억원 입금이 완료됐고, 건축허가만 나면 곧바로 착공할 준비를 마쳤다"고 설명했다.
이어 "인천 경제자유구역청 또한 건축심의 접수를 완료하고 올해 건축허가가 날 수 있도록 빠른 속도로 준비하고 있다"며 "연내 착공이 가능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의료계 관계자들은 연내 착공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의료계 관계자 A씨는 "청라아산병원은 기존 계획대로라면 작년 착공에 들어가 2026년 준공했어야 한다"며 "하지만 여러 이유로 지연되고 올해도 2달 남은 상황 속 사실상 착공이 가능하겠느냐"고 지적했다.
이어 "착공에 들어간 병원들도 자금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이 내년에도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 속 대규모 사업을 쉽게 시작할 수 없을 것"이라며 "서울아산병원도 사실상 중단 상황이라고 알고 있다. 의료계 안정화가 우선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2026년 말 개원을 목표로 추진 중인 800병상 규모 송도세브란스병원 건립 사업은 이미 착공에 들어갔지만, 최근 노동조합 반발에 부딪히면서 새로운 위기에 처했다.
세브란스병원노동조합은 의정갈등으로 경영 위기가 심각한 상황 속, 수천억원대 적자를 우려하며 투자를 강행하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사업 백지화를 주장했다.
8개월째 이어지는 전공의 집단사직과 원자잿값 폭등으로 인해 공사비가 인상되며 악재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병원 측은 예정대로 공사를 진행해 2026년 개원한다는 계획이다.
송도세브란스병원 건립은 연세대학교 송도캠퍼스 조성과 연계한 '의무사항'으로, 기존 계획대로 완공하지 못하면 페널티를 물어야 한다.
연세의료원 관계자는 "병원 운영 상황이 어려운 것은 맞지만 이미 건축이 상당히 진행된 상황에서 분원 사업을 백지화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특히 사업이 무산될 경우 큰 규모의 과징금을 물어야 하는 등 지자체와 긴밀히 얽혀있기 때문에 병원 내부 사정으로 쉽게 사업을 무산시킬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외에도 ▲서울대병원(경기 시흥, 2027년 개원) ▲고려대의료원(경기 과천, 2027년 개원) ▲아주대의료원(경기 평택, 2030년 개원) 등이 분원 설립을 준비 중이다.
■ "전공의 집단사직 여파 '최소 5년' 지속…분원 설립 가능할까?"
분원 설립을 추진하는 병원들은 기존 계획을 고수하기 위해 최대한 노력한다는 입장이지만, 의료계 전문가들은 의정갈등의 여파가 장기간 지속될 것이라 예고하며 대학병원이 대규모 사업을 진행하기는 힘들 것이라 내다봤다.
특히 의대증원 정책에 반대하며 전공의 대다수가 병원을 떠나면서, 이로 인한 대학병원 경영난이 해소되기 위해서는 최소 5년의 기간이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상급종합병원 재무담당자협회 라병학 총무이사는 "정부가 전공의 복귀를 위해 다양한 대책을 내놓았지만 복귀한 전공의는 10%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며 "병원은 대응방안으로 간호사 선발 등을 이제 막 시작하는 입장으로 이전 수술양을 회복하고 안정을 되찾기까지 5년 정도는 소요될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의료계 상황이 어려워 분원설립을 추진하던 병원들도 대다수 중단한 상태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익명을 요구한 서울의 한 대학병원 교수 또한 "계획대로 분원을 설립한다 해도 현 상황에서 새 병원이 수익성을 가질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정부가 의료개혁을 추진하면서 상급종합병원 구조 자체를 뜯어 고치겠다고 예고한 상황 속 병원들은 향후 운영체계를 어떻게 가져가야 할 것인지 심도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공의 이탈 현상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어 당분간은 인력 수급에도 상당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며 "사실상 중앙대 광명병원을 이후로 당분간 새병원 개원 소식은 들리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다"고 전했다.
새병원 공사가 중단되거나 포기하게 되면 수 백억원에 달하는 공사 위약금도 물어야 할 가능성도 나오고 있다.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계약에 따라 공사가 한 차례 연기는 가능하겠지만 전면 뒤집을 경우 천문학적인 위약금을 물어야하는 상황"이라면서 "이 때문에 설립이 추진될 가능성이 높지만 만약 중단하게 되면 재정적인 손해도 감수해야 한다"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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