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대 증원 문제로 촉발된 의-정 갈등 사태가 좀처럼 해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지금과 같은 소강 상태가 유지된다면 2월 시작된 전공의 집단 사직 사태는 해를 넘길 전망이다.
최근 동덕여대 사태를 보면서 의-정 사태와 같은 기시감을 느꼈다. 시위 이후 여론을 수렴했다는 건, 정원 확대 결정 이후 근거 찾기에 나선 정부와 닮았다.
'불법', '폭력', '락카'와 같은 자극적인 단어에만 초점이 맞춰지면서 사태의 촉매제가 된 남녀공학 전환 논의와 같은 본질이 실종됐다는 것까지도 꼭 닮았다.
정치 역학이 얽히면서 강대강 구도만 비춰질 뿐 사태의 기폭제가 된 의대 증원의 당위성, 즉 '환자를 위해' 어떤 정책이 더 적합한지와 관련한 논의가 실종됐기 때문이다. 의대 증원 문제에 의사와 정부만 있을 뿐 정작 환자는 밀려났다는 뜻이다.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수면 아래에 있던 인력 공백의 여파들이 하나 둘씩 터져나오고 있다. 그 영향권에서 가장 취약한 건 물론 환자들이다.
검사, 치료 과정에서 합병증이 발생할 경우 관리를 위해 추가적인 인력이 필요하지만 전공의가 없어진 시점에선 그와 같은 검사나 리스크가 있는 치료는 굳이 하지 않게 됐다는 게 의료진들의 솔직한 속내.
환자를 모집 중인 임상시험 및 해당 임상에서 적절한 치료 옵션이 있는 경우 의사가 환자에게 관련 내용을 안내하고 등록을 권유하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이마저도 대가 끊겼다. 환자의 경과 관찰 및 기록에 필요한 인력이 없다는 이유로 임상 등록 권유도 꺼리게 됐다는 게 일선 의료진들의 귀띔이다.
대학병원 교수들은 전공의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당직과 진료 업무를 떠안아 연구는 물론이고 학술활동에도 지장을 받고 있다. 상황이 지속된다면 결국 교수들마저 탈진, 사직을 결정하거나 방어진료를 넘어 소극진료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연구와 교육이 병행돼야 할 대학병원 특성상 이같은 업무 과중은 기초과학과 임상연구의 부실을, 이는 다시 한국의료 전반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진다. 이 역시 피해는 결국 환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전공의 집단 사직 사태는 단지 의사와 정부 간의 갈등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파를 남긴다. 그런 까닭에 지금 필요한 것은 정부의 신속하고 책임 있는 문제 해결 의지다.
문제를 촉발시킨 당사자라는 점에서 '제로 베이스'에서 시작하는 진정성 있는 대화가 이뤄져야 한다. 의사 증원 정책은 충분한 연구와 공감대를 기반으로 재검토돼야 하며, 합의에 기반한 장기적이고 현실적인 대책이 마련돼야 한다.
결국 의료는 공공의 문제다. 의사와 정부의 힘겨루기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환자를 우선에 두지 않는 실력 행사로는 밥그릇 싸움이라거나 치적을 위한 행정이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정책 결정의 순서가, 방향이 잘못됐다면 과감히 수정할 용기가 필요하다.
이미 의료계 일선 현장에선 현재가 아닌 5년, 10년 후의 여파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이 들린다. 현재를 봉합할 골든타임은 지났다는 것이다.
사직 전공의 사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내년도 동일 수련병원, 동일 연차로 복귀를 허용하면 업무의 연장이 가능하다는 모 학회의 조언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입장을 고집하며 대립하는 것이 필승의 공식이라고 치킨 게임을 하기엔 한국의료의 데드라인이 너무 가까워졌다. 말 그대로 데드라인, 이러다가는 승자없이 다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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