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석학의 경고…"기초의학 무너지면 미래의료도 없다"
국제생리과학연맹(IUPS) 회장인 쿠보 요시히로 교수와 한국의사과학자협회 김종일 회장은 각각 일본과 한국의 현실을 진단하면서도 "기초의학의 지속가능성 확보"라는 같은 목표를 제시했다.[메디칼타임즈=최선 기자] "기초의학이 무너지면 미래 의료도 설 자리를 잃는다."대한의사협회 학술대회에서 만난 한국과 일본의 기초의학 석학들은 공통된 위기의식을 드러냈다. 일본은 연구 생태계의 장기 침체를, 한국은 기초의학 인력의 급격한 감소를 걱정했지만 제시한 해법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었다. 안정적인 연구지원과 의사과학자(Physician Scientist) 양성, 그리고 국가 차원의 장기적인 연구 생태계 구축이다.10일 의사협회는 서울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서울 파르나스에서 '의사의 전문성으로 여는 지속 가능한 미래의료 : AI와 초고령화 시대를 재설계하다'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하고 기초의학의 발전 방안을 모색했다.먼저 국제생리과학연맹(IUPS) 회장인 쿠보 요시히로 교수는 '기초의학 진흥과 차세대 인재 양성: 일본 NIPS 및 IUPS 사례에서의 시사점'을 주제로 발표하며 장기화되고 있는 연구 침체의 현주소를 소개했다.그는 "2000년대 중반 이후 논문 생산성과 연구성과가 감소하고 있지만 한국과 중국은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며 "특히 연구자 주도의 기초연구 기반이 약화되고 있는 점이 우려스럽다"고 말했다.그는 "정부는 연구개발 전체 예산을 꾸준히 투자하고 있지만 연구자 주도의 기초연구 지원은 충분하지 않다"며 "연구과제 선정률이 지나치게 낮아지면 연구비 확보가 사실상 '복권'과 다를 바 없게 된다"고 지적했다.국제생리과학연맹(IUPS) 회장인 쿠보 요시히로 교수경쟁형 연구비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연구자들은 연구계획서를 작성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는 것이 그가 전한 현실. 대학 운영비 역시 지난 20여 년 동안 지속적으로 감소했다는 설명이다.의사과학자의 연구 환경도 녹록지 않다. 임상 진료와 교육, 행정업무 부담으로 연구시간을 확보하기 어렵고, 박사후연구원 과정 이후 안정적인 연구직으로 이어지는 경력 경로도 부족하다. 결국 우수한 연구자들이 산업계나 임상 현장으로 이동하면서 연구 기반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다.쿠보 회장은 "의사과학자는 진료와 교육, 행정 업무까지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연구에 집중할 시간이 매우 부족하다"며 "박사후연구원을 마친 뒤에도 안정적인 연구직을 얻기 어려워 우수한 젊은 인재들이 산업계나 임상으로 떠나고 있다"고 했다.그는 "중개연구와 산업화는 중요하지만 기초연구를 대신할 수는 없다"며 "예상하지 못했던 혁신은 연구자 주도의 호기심 기반 기초연구에서 시작된다"고 강조했다.일본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올해부터 제7기 과학기술혁신기본계획(2026~2030)을 추진하며 기초과학을 국가 핵심 전략으로 다시 끌어올렸다. AI, 양자기술, 반도체, 바이오 등 전략 분야 투자와 함께 지난해부터는 '의학과학 연구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의사과학자의 연구시간 확보, 전문인력 확충, 바이아웃(Buy-out) 제도 도입 등을 본격 추진하고 있다.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재직한 일본 국립생리과학연구소(NIPS)를 대표 사례로 소개했다. NIPS는 전국 연구자들이 첨단 연구장비를 공동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본 유일의 생리학 공동이용 연구기관. 연간 200건이 넘는 공동연구를 수행하는 동시에 매년 약 20개의 연구기술 교육과정을 운영하며 지금까지 4000명 이상의 연구자를 양성했다.쿠보 회장은 "최첨단 연구뿐 아니라 개발도상국을 포함한 전 세계 기초의학 역량을 함께 키우는 것이 인류 보건을 위해 필수적"이라며 "젊은 연구자들에게는 소규모 연구비나 학회 참가 지원 같은 작은 기회가 연구자의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IUPS 회장으로서 국제 협력의 중요성도 강조했다.한국 역시 인력 감소라는 또 다른 위기에 직면해 있다.김종일 한국의사과학자협회 회장은 '의사과학자 양성을 통한 기초의학 발전 전략' 발표에서 지난 30여 년간 국내 기초의학 인력 구조가 크게 바뀌었다고 진단했다.그는 서울의대 생화학교실 사례를 소개하며 "1990년부터 1994년까지는 기초의학교실에 13명의 의대 졸업생이 진출했지만 이후 25년 동안은 14명에 그쳤다"고 설명했다.반면 2019년 정부의 융합형 의사과학자 양성사업이 시작된 이후에는 다시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최근 7년 동안 기초의학교실에 새롭게 합류한 연구자는 11명으로 증가했으며, 과거와 달리 대부분 임상 전문의 과정을 마친 뒤 연구로 진입하는 형태다.김 회장은 "순수 기초의학 트랙은 크게 줄었지만 임상 경험을 가진 연구자가 기초의학으로 유입되는 새로운 흐름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김종일 한국의사과학자협회 회장긍정적인 흐름에서도 문제는 의사과학자의 정의조차 명확치 않다는 점. 기초의학교실 소속 연구자만 의사과학자인지, 임상교수 가운데 기초연구를 수행하는 의사도 포함해야 하는지, 연구시간이나 연구비 규모를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지 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실제로 정부도 의사과학자 양성사업을 추진하면서 현재 국내 의사과학자가 얼마나 되는지조차 객관적인 통계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김 회장은 "미국도 의사과학자를 하나의 자격으로 규정하지 않는다"며 "연구비 수주나 연구 활동 여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추계할 뿐이며 MD-PhD 역시 여러 경로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설명했다.그는 우리나라 역시 학부생부터 전공의, 박사과정까지 이어지는 전주기 의사과학자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연구 참여 인력은 증가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특히 전문연구요원 제도가 연구자로 진입하는 가장 강력한 유인책이라고 분석했다.이어 "박사학위를 마친 젊은 연구자가 독립적인 연구자로 성장하지 못하면 후배들도 의사과학자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라며 "연구비 지원과 연구 전념 시간 보장, 안정적인 연구직 진입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이를 위해 의사과학자 양성 예산 확대, MD-PhD 등 다양한 진입 경로 마련, 전공의 연구트랙 도입, 전문연구요원 제도 유지, 박사학위 이후 정착 지원, 국가 차원의 컨트롤타워 구축 등을 핵심 과제로 제시했다.국가별 현실은 다르지만 두 연자가 제시한 해법은 비슷했다. 단기 성과보다 연구 생태계를 키우는 장기 투자, 의사과학자의 안정적인 성장 기반 마련, 그리고 국경을 넘는 연구 협력이야말로 미래 의료 경쟁력을 결정할 핵심 과제라는 것.일본은 세계 최고 수준의 연구 역량을 유지하기 위해 기초연구 생태계 복원에 집중하고 있고, 한국은 감소한 기초의학 인력을 의사과학자 양성을 통해 회복하려 하고 있다. 결국 연구자가 안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지 못하면 기초의학의 미래도 없다는 것이 두 연자의 공통된 결론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