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진료 대신 획일적인 진료를 강요받으며 살아가는 아픈 의사들. 그들을 돌보는 변호사가 되겠습니다."
의대 공부를 마친 뒤 어렵게 딴 '의사' 타이틀이다. 마취통증 전문의를 따기까지 어려운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그런데도 '의사'를 버리고 다른 직함으로 인생의 새 출발을 기획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법무법인 서로의 윤혜정 변호사의 이야기다.
윤 변호사의 전직은 의사. 2002년에 의사 면허를, 2008년엔 마취통증과 전문의를 땄다. 이후 1년간 소위 '괜찮은' 로컬병원에서 일하면서 얻은 보람도 쏠쏠했다.
하지만 불과 1년만에 로스쿨 진학을 선택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저뿐만 아니라 의사들 중에는 '헛 똑똑이'가 많은 게 사실입니다. 대학교에서부터 적게는 6년 많게는 10년 넘게 환자 진료보는 방법만 배우다보니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죠. 법을 공부하면 의사와 환자들에게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2009년 진학한 로스쿨 생활이 의욕만큼 쉽지만은 않았다. 전혀 생소한 분야이기 때문. 게다가 학생들 중에는 사법고시 등 법에 관한 공부를 하던 사람들이 많아 따라잡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만학도의 공부 삼매경에는 의사인 남편의 도움도 컸다.
남편이 "의사들도 법을 알아야 한다"는 응원과 함께 가사와 양육까지 돌봐 준 덕에 지난 해 '변호사' 타이틀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졸업 후 윤 변호사는 주저 없이 법무법인 서로를 선택했다.
의료소송 분야에 이미 정평이 나 있는 곳인 데다가 교수들 역시 의사의 경험을 살리기에는 이곳이 적격이라고 추천했기 때문이다.
서로에 둥지를 튼 윤 변호사는 의료소송과 분쟁을 전담하면서 진료를 보는 것 만큼 자주 차트를 보고 있다.
"의료소송을 맡으면서 과실 여부를 살피기 위해 차트 리뷰를 자주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차트를 볼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게다가 의사이자 변호사로서 최대한 중립적인 위치에서 사건을 판단할 수 있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의료분쟁의 경우 약을 적정하게 사용했는지 여부를 살피거나 환자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료 과정을 쉽게 풀어 설명해 주는 일 또한 의사의 경험이 빛을 발하는 부분.
의료사고 피해자들을 상담해 주면서 변호사로서 보람도 느끼고 있다.
얼마 전 양악수술로 피해를 입은 환자로부터 상담 후 "정말 고맙다"는 감사 전화를 받은 것.
그는 후배들에게 "의대를 나왔다고 해서 반드시 의사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뜻깊은 충고도 했다.
의사의 경험을 살려 사회 여러 분야에 진출 할수록 의료인이 전문가로서 대접받고 존중받는 사회가 된다는 뜻이다.
"의사 출신 변호사로서 의사의 희생만을 강요하는 잘못된 보건의료 제도와 인식들을 조금씩 고쳐 나가고 싶습니다."
좋은 약을 쓰다가 삭감을 당하거나 소신 진료를 하다가 환수를 당하는 등 진료의 자율성이 보장되지 않는 보건의료 체계에서 피해를 보는 의사들이 많다는 것.
잘못된 제도에 신음하는 의사들을 돌보는 것이 바로 윤 변호사의 최종 목표다.
윤 변호사는 "이런 이들이 제기하는 소송에서 '법'과 '의사' 사이의 가교가 되고 싶다"면서 "그런 의미에서 의사를 포기한 게 아니라 의사 업무의 연장 선상에서 일을 하는 셈"이라고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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