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가장 능동적이고 화끈한 분과를 꼽는다면 '응급의학과'를 꼽고 싶다. 바쁠 때의 응급실은 시장터 혹은 전쟁터라고 부를 정도로 정신이 없다. 반대로 그 대척점에는 안정적이고 조화를 최우선으로 하는 '마취통증의학과'가 있다. 이는 해당 과를 다루는 의사들의 성격에도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외과 선생님들이 화통하고 걸걸한 무인 같은 느낌이 라면 마취과 선생님들은 평온한 호인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의학 분야도 중요하지만 그 분과를 함에 있어 분과의 성격과 분위기가 실제로 자신의 성격과 잘 맞아야 한다.
마취과 안에서도 선생님들 사이에 개성 차이가 두드러질 때가 있다. 동일한 수술을 할 때 어떤 교수님은 최소한의 약물로 마취 심도를 조절하고 어떤 교수님은 마약성 진통제를 고용량으로 쓰면서 따르는 부작용을 줄이는 약도 함께 쓰는 식으로 마취 약물을 넉넉히 쓴다. 선생님들마다 다른 마취 방식은 저마다의 학문적 이유와 임상적 경험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람은 어딘가에 부딪히거나 살짝 베이기만 해도 통증을 쉽게 느낀다. 수술은 인위적으로 절개를 하고 장기를 조작하고 뼈를 깎고 피부 이식을 하는 등 우리 몸에 극심한 자극을 주는 행위다. 이러한 자극으로부터 최대한 몸을 평상시처럼 유지하는 것이 마취과의 핵심이다.
우리 몸에 통증이 생기면 혈압이 상승하고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며 근육이 수축하는 등 일련의 체내 반응들이 발생한다. 실제로 마취 도중 환자 스스로는 자각은 못해도 체내 반응은 진행된다. 환자 개개인의 항상성에 맞추어 흔들리지 않게끔 마취 심도를 조절하고 진통제를 써서 마취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최근에는 마취 심도를 알 수 있는 여러 기술들이 발명되었다. 그중 'BIS, bispectral index'라 하여 마취 중 뇌 활동 상태를 파악해 마취 심도가 적절한지 알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기술도 이용되고 있다. BIS와 함께 심박동수와 혈압, 이산화탄소 농도 등을 체크해 환자의 마취 상태가 적절한지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마취제의 농도를 조절하게 된다.
안전하고 신속한 마취를 위한 정형화된 방법들이 있어서 표면적으로 보면 마취하는 것이 단순해보일 수 있다. 하지만 수술의 종류와 환자의 상태에 따라 쓰는 약물과 마취 유도까지의 과정, 마취 상태를 유지하는 과정, 마취에서 깨우는 과정과 방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보면 마취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마취과도 은근히 신경쓸 것이 많고 피곤한 것 같아요."
"그렇죠? 저는 원래 학생 때부터 마취과에 관심이 있어서 결국 마취과 의사가 된 케이스예요. 처음 마취과 인턴으로 일할 때는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면 되는 줄 알고 편할 거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알고 보니 계속 신경 써야 하는 것들이 많아서 쉽지 않다는 게 결론입니다."
마취과 교과서에는 마취과 의사의 경우 마취를 하는 2시간마다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권고되어 있다. 이는 마취되어 있는 환자가 스스로 증상을 호소할 수 없기 때문에 마취과 의사가 환자 몸의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집중력과 인내심이 좋은 의사라도 10시간이 넘는 수술을 꼬박 감시하며 버틸 수는 없다. 휴식 없는 과신은 방심과 사고로 이어질 수 있다.
혈압, 맥박, 혈중 산소포화도, 호흡수, 일회호흡량, 체온, 호흡기말 이산화탄소, 최대흡기 압력, 호흡마취제농도, 정맥주입용 진통제농도, 수액종류, 수액주입속도, 시간당 소변양 등. 기본적으로 마취 도중 확인해야 할 환자들의 생체징후는 많다. 특히 간이식 마취에 있어서는 마취과 의사가 봐야 하는 수치들이 어림잡아 50여 개가 넘는다.
본원 마취과에서는 마취 기록지를 손으로 기입하는 전통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마취가 잘 이루어지는지 5분마다 확인하여 혈압과 맥박을 기입한다. 그외 시간마다 확인한 생체징후를 기입하고 마취 도중 썼던 약물에 대해서도 기입한다.
마취과 인턴이 되어 가장 먼저 배운 것은 마취 기록지를 작성하는 방법, 소위 챠팅Charting이라고 하는 일이다. 5분마다 환자의 혈압을 그리다 보면 어느새 수학 그래프처럼 생긴 하나의 그래프가 만들어진다.
챠팅은 '갈매기 그리기'라고도 부르는데, 마취 순간마다 환자의 상태를 표기하여 나중에는 수술 전반에 걸쳐 마취 도중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손쉽게 알 수 있는 한 장의 정보지가 되는 것이다.
마취 도중 챠팅을 할 때 깔끔하게 기입하면 보기도 좋고 한눈에 파악하기도 편하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 하지 않던가. 예쁘게 '갈매기'들을 그려놓고 나면 뿌듯하다. 이것이 매일 수술 방포 뒤에 앉아 갈매기를 공들여 그리는 마취과 인턴의 시작이다.
[30]편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에 나오는 '서젼(surgeon, 외과의)'을 비롯한 기타 의학 용어들은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실제 에이티피컬 병원에서 사용되는 외래어 발음 그대로 사용했습니다.
이 글은 박성우 의사의 저서 '인턴노트'에서 발췌했으며 해당 도서에서 전문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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