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력을 갈아 넣는다." 제품 출시 기일에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인적자원을 혹사시키는 경우를 일컫는 표현이다. 목적 달성을 위해 인간을 수단화하는 현상을 비꼬는 말이지만 유독 한국에서는 이런 표현이 심심찮게 쓰인다. 그만큼 빈번하다는 뜻. '인적자원'이란 용어 역시 인간을 소모품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유물론적 세계관의 투영이다.
IT업계의 야근 문화가 사회 이슈로 거론됐을 때 이런 표현이 회자됐지만 정작 요즘 인력을 갈아넣는 분야는 따로 있다. 바로 제약/바이오다.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젓는 업체들이 우호죽순 늘고 있다. 코로나19 백신/치료제 개발 착수란 한 단어로 주가가 급등하니 바이오협회마저도 데이터로 증명하라고 당부할 정도. 너도 나도 임상 착수 선언을 하는 마당에 속도전은 당연한 수순이다.
코로나19 항체 치료제 개발에서 속도감을 제대로 보여주는 업체는 셀트리온이다. 코로나19 확산 방지 종합 대응방안 발표부터 항체 치료제 개발 첫 단계 완료, 2단계 본격 돌입과 같은 세번의 발표가 한 달안에 나왔다.
회복환자의 혈액에서 항체 후보군을 구축하고 항원에 결합하는 300종의 항체 확보에 성공하는 데는 역시 인력의 힘이 컸다. 셀트리온은 이를 일컫어 "연구개발진이 24시간 교대 체제로 총 투입돼 이뤄낸 결과"로 표현했다. 일반 항체 치료제 신약개발의 경우 이 단계까지만 3~6개월이 걸린다.
셀트리온은 인체 임상이 가능한 제품 개발완료 목표 시점을 기존 6개월 내에서 4개월 내로 앞당겨 오는 7월 말까지 인체 투여 준비를 마치기 위해 회사의 가용 개발 자원을 총동원한다는 계획이다.
셀트리온은 한 예다. 어찌된 영문인지 치료제 개발 경쟁에 격려보다 우려 목소리가 나온다. 이유는 간단한다. 잘못 만든 코로나19 백신/치료제는 코로나19보다 더 중한 부작용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느린 것은 느린 이유가 있다. 앞서 거론한 IT업계도 임상처럼 베타테스트 기간을 거친다. 인력을 갈아넣었는데도 정식 오픈 후 사소한, 혹은 중대한 버그가 발견된다. 버그는 수정으로 끝나지만 의약품은 다르다. 안전성과 유효성을 확인한 '검증'받은 의약품도 사망 등 심각한 부작용 사례로 퇴출되기도 한다. 시판후조사(PMS)를 반드시 진행하는 것은 그런 연유. 적어도 의약품 개발에 있어서 성급함은 독이 될 가능성이 크다.
올해 1월 홍콩에서 코로나19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는 말이 나왔지만 실체는 종적을 감췄다. 최근엔 장기간 진행된 후천성 면역결핍증(HIV) 백신 개발이 수포로 돌아갔다. 유망 HIV 예방 백신으로 거론되던 후보군이었지만 대규모 임상시험이 실패하며 개발이 중단됐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코로나19의 사촌쯤 되는 사스와 메르스 때도 다양한 치료제 개발마저 실패했다. 근거없는 낙관론에 기대 인력을 갈아넣는 속도전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코오롱생명과학 골관절염 치료제 인보사는 1차 중앙약사심의위원회 회의 결과 유효성, 안전성 검증이 미심쩍다는 의견에도 불구하고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세계 최초 세포치료제 타이틀을 내줬다. 그리고 결과는 모두가 아는대로 허가 취소라는 허무한 마무리다.
빠르면 탈이 난다. 의약품의 경우엔 특히 그렇다. 요즘 국내 바이오업체의 신뢰도가 흔들리고 있다. '세계 첫'이라는 타이틀에 눈이 멀은 속도전, 그리고 조건부 허가와 같은 성급한 지원은 그 신뢰도 하락에 쐐기를 박을 수 있다. 적어도 의약품에 있어서 '속도는 독(毒)'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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