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고령화 등으로 의료비는 폭증하고 있고 의료기기 시장도 급성장세를 보이고 있지만 우리나라 의료기기 산업은 여전히 그자리에 머물러 있어요. 과거의 틀을 완전히 버리고 새로운 공식을 만들어야 활로를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지난 1월 개정된 의료기기법 시행령에 따라 의료기기 위원회 위원수를 대폭 확대하는 대대적 개편 작업을 마무리했다.
이번 개편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규모 확대와 더불어 과거 식약처 차장이 맡던 의료기기위원회 위원장 자리를 민간 위원 대표가 함께 하는 공동위원장 체제로 전환한 것.
의료기기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는 과정에 의학 전문가의 의견을 더욱 비중있게 반영하기 위한 방편이다. 의료 인공지능(AI)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혁신 의료기기들이 지속적으로 개발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고도화된 전문성이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신설된 의료기기위원회 공동위원장은 오송첨단의료산업진흥재단 이사장과 한국보건산업진흥원 R&D 본부장을 지낸 선경 교수(고대의대 명예교수)가 맡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2년간 식약처 차장과 함께 197명에 달하는 의료기기위원회를 이끌어 가게된 선경 위원장은 국내 의료기기 산업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본격적인 위원회 활동에 앞서 만난 그는 산업 구조의 대대적 혁신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과거의 공식을 완전히 버리고 지금의 상황과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해야 해법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문제에 대해 정부와 전문가, 기업들이 공통된 문제 의식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국내 의료비 추이를 살펴보면 날이 갈수록 그 기울기가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어요. 의료기기 수요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유독 우리나라 기업들의 매출과 비중은 그 기울기가 변함이 없거든요. 모든게 다 올라가는데 국내 의료기기 산업은 제자리에 있다는 얘기죠. 바로 이 부분에서 모든 것을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실제로 선경 위원장은 이 부분에 국내 의료산업의 구조적 문제점들이 녹아있다고 설명했다. 저수가 구조속에서 의사들이 가져가는 파이는 정해져 있고 또한 국내 기업들이 차지하는 비중도 그대로라면 누가 나머지 공간의 돈을 가져가고 있는가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우선시 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선경 위원장은 "이러한 괴리는 '시장'이 폭발적으로 크고 있는데 국내 '산업'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라며 "여기에 상수에 가까운 의사들의 의료 행위료를 대입해보면 결국 말 그대로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가져가고 있다는 뜻"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이러한 괴리를 그대로 둔채 단순히 의료기기 산업 육성책만 내놓는다면 계속해서 왕서방의 배만 불리는 꼴이 될 수 있다"며 "말 그대로 '산업'이 클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야지 '시장'을 키우는 방향으로 정책이 흐르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국내 기업들이 개발, R&D, 상용화, 수출에 이르는 과정을 스스로 이뤄낼 수 있도록 지원하며 기초체력을 키우기 위한 정책적, 제도적 노력이 무엇보다 우선시 돼야 한다는 것.
이미 국내 기업들은 글로벌 기업들과 경쟁에서 기울어진 운동장에 있는 만큼 그 높이와 간극을 좁히는데 예산과 지원을 쏟아야지 경기력을 높인다며 운동장에 잔디를 깔거나 돔 구장을 설치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안된다는 설명이다.
선경 위원장은 "국내 기업들이 급여권에 진입하려 하면 과거 기술에 대입시켜 저수가 체제 안으로 밀어넣거나 수가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라며 "그러다보니 일부 기업들은 아예 글로벌 기업들이 수가를 받는 것을 기다린 뒤 후발 주자로 안정적이게 시장에 진입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결국 모두가 앞다퉈 '선도'를 외치면서 '추격'형 구도를 조성하고 있는 셈"이라며 "하지만 국내 기업들이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면 산업 육성책이라는 명목으로 엉뚱한 곳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며 오히려 왕서방의 뒤를 밀어주는 제도를 만들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러한 면에서 선경 위원장은 시장과 산업, 또한 규제의 개념을 명확히 하고 문제가 있는 부분을 면밀하게 검토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정부는 물론 기업들과 전문가들마저 이 개념들을 혼동하면서 엉뚱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는 지적. 결국 어떤 부분에 어떠한 문제가 있는지에 대해 정부와 전문가, 기업들간에 공통된 인식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제언이다.
선경 위원장은 "국내 기업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른바 '죽음의 계곡'으로 식약처와 네카, 심평원의 허가, 심사 과정을 들며 규제 개혁을 요구한다"며 "하지만 이 부분의 문제를 가만히 살펴보면 이러한 규제때문에 상용화에 문제를 겪는 것이 아니라 이 과정을 통과하는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자금'이 문제인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미국의 경우 민간 펀드의 비중이 워낙 큰 만큼 FDA의 규제 허들을 넘을때까지 버틸 수 있는 버팀목이 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정부 모태 펀드 주도로 흐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결국 규제로 인해 죽음의 계곡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속칭 '돈의 계곡'에 빠져있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현재 개발 단계에 쏠려 있는 예산을 차근차근 후속 단계로 빼가며 이 과정을 견딜 수 있는 기초 체력을 키우는데 정책적 노력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만큼 그는 이러한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하기 위한 기업의 노력도 필수적으로 동반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단순히 정부에서 무언가 대책을 마련해 주기만을 기다려서는 안된다는 것.
단순히 제도와 규제, 수가만을 탓하기 보다는 우리나라 의료기기 산업 전체가 동반 성장할 수 있는 방법들을 함께 고민하며 적극적으로 이에 대한 타당성 있는 제안들을 정부에 전달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선경 위원장은 "식약처와 네카는 국민 건강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점에서 글로벌 스탠다드에서 단 한발도 물러서서는 안된다"며 "환자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규제와 기준은 절대 타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규제라고도 볼 수 없다"고 못박았다.
아울러 그는 "안전성과 유효성에 대한 잣대는 점점 높여가되 우리나라 기업들이 글로벌 기업들에 비해 불이익을 받는 요소들을 면밀히 파악해 이 부분을 중점적으로 논의 테이블에 올려 놓는 선택적 규제 개혁이 필요하다"며 "기업 입장에서도 골목상권을 지키겠다는 지엽적 사고를 내려놓고 전체 파이를 늘리기 위한 동반 성장을 목표로 삼아야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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