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의사 국가시험 문항에 대한 의과계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의과에서 CT 등 의료기기 영상을 기반으로 한 문제를 출제하고 있어 시험 응시자의 전문성을 저해하고 있으며, 이는 국민 건강에 위해가 된다는 지적이다.
17일 대한의사협회 한방대책특별위원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최근 출제된 한의사 국가시험이 의과 영역을 침범하고 있다고 규탄했다.
한특위는 지난 8월 발표된 '직무기반 한의사 국가시험을 위한 개선방안 연구'를 문제로 지적했다.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 연구용역으로 진행된 해당 연구는 한의사 국가시험 출제범위에 CT 등 의료기기 영상 분석 내용이 포함돼야 한다는 취지로 3500만 원의 예산이 집행됐다.
한특위는 해당 연구의 예시 문항을 공개하며 관련 사례가 환자의 생명이 위중한 상황임에도 한의치료를 선택하도록 한다고 규탄했다.
'사상체질의학 질병(KCD)진단 및 치료하기' 분야 출제 문제를 보면 80세 남자가 구토와 갑작스럽고 극심한 두통으로 내원했다며 뇌 CT 사진을 제시하고 있다. 또 적합한 처방에 대한 정답으로 중풍에 사용되는 청폐사간탕을 제시하고 있다.
한특위는 이 문항에서 예시로 보여준 사진은 뇌종양인 '교모세포종'을 앓고 있는 60세 여성 환자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지적했다.
실제 해당 사진은 호주 로열멜번병원 영상의학과 프랭크 게일라드 교수가 영상의학 백과사전 사이트인 Radiopaedia에 게시한 것과 상당히 유사하다.
사진 도용 문제를 둘째 치더라도 사망 위험이 높아 외과적 전적출술, 전뇌 방사선치료 및 항암제 복용이 필요한 질환에 대한 처방을 청폐사간탕으로 정하는 것은 엉터리라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한특위 김교웅 위원장은 "다른 환자 사례를 무단으로 사용하며 연령과 증상을 작위적으로 만들고, 뇌종양을 중풍으로 잘못 진단하는 엉터리 연구에 막대한 혈세가 낭비됐다"며 "중풍으로 오인한 출제여도 문제고, 악성 뇌종양으로 수술이 필요한 환자에게 한약을 처방하라는 출제여도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이 같은 연구에 국가예산이 낭비되지 않도록 재발방지책이 마련해야 하며 국시원은 관련 연구진행 및 결과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주장이다.
한특위는 최근 5년 간 시행된 한의사 국가시험 필기문제를 분석한 결과, 시험문항에 의과영역 내용과 의과 의료기기 관련 문제 증가하는 추세라고 진단했다.
관련 자료를 보면 2018년 한의사 시험문항은 333개로 이중 27.3%가 의과영역 문항이었다. 의과의료기기 포함 문제는 10.5%다. 하지만 올해 의과영역 문항 비중이 36.5%로 10%포인트 가까이 증가하고, 의과의료기기포함 문제는 22.3%로 두 배 수준으로 늘어났다.
한특위는 관련 문항으로 2018년과 2021년 시험에서 출제된 문제를 공개했다. 관련 내용은 재생불량성빈혈, 림프종, 급성백혈병을 앓고 있거나 응급조치가 시급한 환자에 대한 한의치료를 선택하는 식으로 출제가 됐다.
한특위는 의과에서도 난치병으로 분류되는 재생불량빈혈에 적합한 한의치료법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의료윤리적으로 문제가 된다고 지적했다.
림프종과 관련해선 확실한 의과치료법이 있는 상황에서 한의치료를 제공하는 것은 불필요하며 오히려 환자의 생명과 금전적 피해를 초래한다고 반박했다.
급성백혈병 환자가 전신 경련 및 구토를 일으킨 사례를 제시한 문제와 관련해선, 응급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문항이라고 규탄했다. 진단·치료가 지체돼 환자가 생명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것. 이 같은 방식은 관련 교육을 받은 한의대생이 임상에서 잘못된 판단을 하도록 유도해 사태가 커질 수 있다는 우려다.
이와 관련 의협 김상일 정책이사는 "위와 같은 한의사 국가시험으로 우수한 인력을 배출할 수 있을지 의문스러울 지경이다. 이는 결국 국민 피해로 귀결될 것이 자명하다"며 "의협은 국시원의 한의사 국가시험 관리 행태를 강력히 규탄하며, 국시원이 본래의 설립 취지에 맞게 한의사 국가시험과 의사 국가시험과 명확히 구분하기를 촉구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국시원이 한의사 국가시험을 제대로 관리하고 있는지에 대한 정부 차원의 조사가 필요하다. 부당한 사실이 있을 경우 국시원에 시정 요구 내지 필요한 조치를 명할 것을 요구한다"며 "조속히 의료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한의사 국가시험의 구체적인 시험과목과 이에 따른 출제범위를 규정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의협 황찬하 변호사는 이 같은 출제 방식이 무면허 의료행위 조장·교사 행위가 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의료법이 정한 면허 범위에 따라 의사는 의료행위를, 한의사는 한의 의료행위를 해야 하며, 이를 넘는 행위를 하는 경우 무면허 의료행위로 불법이라는 이유에서다.
황 변호사는 "면허를 받기 위한 국가시험은 의사, 한의사로서 각각 갖추어야 할 지식과 기능에 관해 행하게 돼있고, 이를 위해 의사·한의사 시험과목을 각각 정하고 있다"며 "우리나라 면허제도와 이에 따른 국가시험은 의사·한의사를 이원화해 독립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이어 "대법원도 한의 의료행위를 '우리 선조들로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한의학을 기초로 한 질병의 예방이나 치료행위'로 정의하는 등 의료행위와 구분하고 있다"며 "국시원은 보건의료인 국가시험제도를 전문적·객관적으로 운영해 우수한 보건의료인을 배출하는 본래의 취지에 맞게 운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협 이정근 상근부회장은 그간 출제된 한의사 국가시험 문제를 전수조사해 면밀히 분석하고, 한의사의 무면허의료행위를 차단할 것을 요구했다. 이를 통해 국민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또 의과영역 침범 및 무면허의행위를 조장하는 한의사 국가시험 문제에 대한 관리·감독을 소홀히 한 국시원 및 관계당국 책임자를 엄중 문책하라고 촉구했다.
이 상근부회장은 "한의사 국가시험 문제를 통해서 본 우리나라 한의학의 현실은 독자적인 학문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보조적학문으로 전락하고 말았다"며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한의학을 독립된 학문으로 인정하고 유지시켜야 할지 의문이 든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의사 국가시험은 한의사의 무면허의료행위를 조장·양산하는 시험대로 전락하고 말았다"며 "이는 한의사의 불법행위를 부추기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과학적 근거가 없는 위험한 처방 및 처치로 국민 생명과 건강을 위협하게 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더 이상 한의대생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말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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