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청소년과 등 기피과를 중심으로 해외 취업 문턱을 두드리는 의사들이 늘어나고 있다. 관련 업계에서도 2000년대 일었던 해외 취업 붐이 재현되는 것이 아니냐는 반응이 나온다.
17일 의료계에 따르면 최근 해외 취업 컨설팅회사에 상담을 문의하는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들이 늘어나고 있다. 계속되는 저출산과 저수가, 악성 민원 및 소송 등으로 대내외적인 여건이 악화하면서 해외로 눈을 돌리는 모습이다.
■상담 증가세 실감하는 컨설팅업계 "붐 재현되나"
실제 컨설팅 업계에서도 최근 소청과를 중심으로 상담을 요청하는 의사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반응이 나온다. 특히 미국 의사고시인 USMLE를 컨설팅하는 회사에 문의가 몰리는 모습이다.
이와 관련 지메스컨설팅 장준희 대표는 "소청과나 산부인과 전공의를 중심으로 USMLE를 준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며 "특히 미국 소청과는 인턴 과정이 없고 3년의 수련 기간만 거치면 된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 의사고시를 넘는 장벽은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의과대학을 나온 분들이라면 조금만 노력해도 그 관문을 통과할 수 있다"며 "2004~2005년 의사 해외 취업 붐이 크게 일어났는데 최근 그 문이 다시 열려가는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민 문의도 이어지고 있다. 현지 면허와 별개로 영주권을 취득해야 하는 등 비교적 까다로운 조건에도 고학력자 독립 이민(NIW) 컨설팅회사에 의사들의 문의가 꾸준하다는 것. NIW는 미국 국익에 유익하다고 판단되는 각 분야 전문가를 대상으로 스폰서와 노동허가서를 면제하고 영주권을 허락하는 제도다.
이와 관련 이민법인 대양 김지선 대표이사는 "그동안 의사들의 문의가 꾸준히 있었고 코로나19를 겪으면서 현지 의료시스템이 부족해지기도 했다"며 "만족도도 높다. 미국 면허만 있다면 급여나 근무 여건이 우리나라보다 훨씬 낫고 자녀 교육에도 이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미국 소청과, 근무 시간 짧고 1억 원 이상 더 벌어
현장 소청과 전문의들의 말을 들어보면, 이들이 해외 취업을 고민하는 가장 큰 이유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저출산이 문제인데 우리나라 출산율은 여성 1인당 0.84명으로 이마저도 감소세다. 반면 미국 출산율은 여성 1인당 1.64명으로 두 배 수준이다.
출산율은 곧 소청과 의사들의 수입으로 직결되는 만큼, 이를 보전하기 위해선 수가를 조정해야 하지만 정부가 응할 리 없다는 게 현장 반응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내년도 의원 유형 수가 인상률이 1.6%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하는 등 여건이 더욱 악화하고 있다는 것. 급여진료 비중이 큰 소청과 입장에선 타격이 더 클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학부모들의 악성 민원이나 소송 위험 등으로 근무 환경까지 나빠지고 있다. 특히 학부모 민원과 관련해선 교사들 역시 같은 이유로 해외 취업 상담이 증가했다는 게 컨설팅 업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미국 소청과 의사와 우리나라 소청과 의사와의 근무 여건 격차에서 오는 박탈감도 있다. 의학정보 사이트인 메드스캐이프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미국 의사 소득은 연평균 33만9000달러(한화 약 4억5476만 원)이다.
또 미국 의사들의 평균 근무 시간은 주당 50시간으로 여기에는 환자 진료, 차트 작성, 서류 작업 및 관리 작업 등 부수적인 업무도 포함된다.
미국 소청과 전문의는 그중에서 비교적 낮은 24만3000달러(한화 약 3억2598만)의 연봉을 받지만 근무 시간 역시 주 47시간으로 더 짧다.
■지속가능성 떨어진 국내 소청과 "장기적 어려움 예상"
반면 우리나라 소청과 의사들은 이보다 1억 원 이상 낮은 수입을 받으면서 주 6일 이상 근무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
실제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인력실태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소청과 개원의 소득은 2019년 1억8000만 원이었다가 코로나19가 시작된 2020년 1억875만 원으로 급감했다. 최근 코로나19 유행세가 잦아들긴 했지만, 2019년 수준으론 회복되지 않았다는 게 의료계 중론이다.
특히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최근 10년간 한국의 소아청소년과 진료비 경향 분석'을 보면 연구진은 "코로나19 발생 이후 마스크 착용, 손씻기 등 생활방역이 습관화됐기 때문에 코로나19 감염병이 끝난 후에도 상당 기간 호흡기계 질환 발생 비율은 줄어들 가능성이 높다"라며 "진료건수와 진료비가 가장 크게 감소한 소청과, 그 중에서도 의원급 소청과, 특히 지역에서 활동하는 의원급 소청과의 경영 어려움은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소청과는 USMLE Step 1·2·3 중 1·2를 합격한 후 3년 간의 레지던트 과정만 밟으면 되는데 미국 근무 여건을 고려하면 이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다는 것.
앞서 대한소아청소년과의사회는 지난 3월 이 같은 문제를 이유로 더는 소청과 진료를 하지 않겠다는 폐과 선언을 한 바 있다. 기존 진료를 일반과 진료로 전환하겠다는 뜻인데 현 상황에선 도저히 아이들을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이들을 진료하고 싶은 의사들이 미국행을 택하는 모습이다.
이와 관련 한 소청과 원장은 "소청과를 선택한 의사들은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들이 낫는 것을 보는 게 행복한 사람들이다"라며 "일반과 진료로 전환한 의사들은 의원 운영이 더 편하고 안정적이게 됐다고 한다. 같은 조건에서 아이들을 진료하고 싶은 사람들이 해외로 눈을 돌리는 것" 이라고 말했다.
■회복 안 되는 전공의 지원율 "복지부는 책임져라"
소청과의사회 임현택 회장은 우리나라 소청과 상황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복지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폐과 선언 이후에도 소청과 상황은 나아진 게 없다는 지적이다.
실제 메디칼타임즈가 소청과 수련병원 34곳을 대상으로 2023년도 후반기 전공의 모집결과를 파악한 결과, 삼성서울병원과 신촌세브란스병원을 제외한 32곳이 지원자가 없었다. 이대로라면 내년도 전공의 지원율도 불 보듯 뻔하다는 우려다.
이와 관련 소청과의사회 임현택 회장은 "소청과의 위기를 물어올 때마다 지겹다. 매번 같은 얘기를 해도 정부가 꿈쩍도 안 하는 데 무슨 소용이 있나 싶다"며 "내년도 전공의 모집까지 4개월도 안 남았는데 어떻게 되겠느냐"고 지적했다.
이어 "이번에도 지원율이 회복되지 않으면 정부 책임이 크다"며 "의사회 게시판에서도 해외 취업에 관심을 보이는 회원들이 보인다. 애들 건강을 보는 학문인데 사람 자체가 없다는 건 굉장히 심각한 문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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