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둘이 있다.
핸폰에는 아들1,아들2로 저장되어 있다.
아들2는 나름대로 정리정돈이 되는 친구다.
아들1은 정리정돈하고 담 쌓고 사는 친구다.
아들2는 일찌감치 독립했다.
유학후 군대,취업후 결혼이 이어졌다.
아들1은 콩팥이 안좋아 이식까지 했다.
올해초 독립할때까지 40년을 넘게 계속 같이 살았다.
핸드캡이 있으니 늘 집구석에 있었다.
그의 책상에는 늘 먼지와 함께 수북히 뭔가가 쌓여 있었고
그 속에서 모니터를 보는 것이 그의 삶이었다.
늘 책상이 더러웠다.
그것을 보는 내 마음은 편치않았다.
"재는 누구 닮아 저래?'
집사람도 가끔 책상을 청소해 주곤했다.
수북히 쌓여 있는 것들은 그대로 두고 먼지만 딱는데 그쳤다.
나는 아들1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야 토요일까지 책상 청소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쓸어버릴꺼야"
" 뭔 책상이 이렇게 더러워"
아들1은 늘 이렇게 대답했다.
"내버려두세요 내가 알아서 할테니"
언성이 높아진다.
"니가 알아서 한다고? ...누가 와서 니책상보면 어쩔라고 그러니"
책상위에 널브러져 있던 모든 것을 싹 담아
멀리있는 공동쓰레기 수거함에 버린적도 있다.
퇴근을 늦게하면서 직원들의 책상을 보면 가지각색이다.
서류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채 퇴근한 김대리도 보이고
진짜 깔금하게 볼펜 한자루도 제위치에 있는 이차장 책상도 보인다.
"책상이 저렇게 더러운 것을 보면 ...일도 짜임새 있게 좀 못할것 같아"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다가 Thomas Gordon의 LET leader effectiveness training를 만났다.
심리학에서 얘기하는 '프레임'이란 단어도 알게되었다.
무엇보다도 큰 소득은 마음의 창을 통해 바라본 '문제의 소유'였다.
‘그 더러운 책상문제’가 아들1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들은 더러운 책상을 가진 적이 없다.
아들1은 아무문제 없다.
김대리도 아무문제 없다.
아들1도 김대리도 불편하지 않았다.
'아들1과 김대리의 더러운 책상'을 보는 나는 불편했다.
정작 더러운 책상을 소유한 그들은 더러움을 못 느끼고 쓰고 있는데
내가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더러운 책상은 나의 문제다.
이후부터 '더러운 책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아들1과 김대리를 보는 눈이 너그러워 졌다.
편견이 사그러지는 그런 맛을 봤다.
다른 것도 내가 불편한데 괜스레 상대방의 문제로 오인하는 것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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