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는 충분한 보상을 받으면서 의료진은 과실로 인한 엄청난 배상 부담의 공포를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판사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의료계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길 바라지만, 동시에 국민의 생명과 신체를 지켜야 한다."
의료법연구회장으로 활동하는 서울고등법원 차문호 부장판사가 의료계에서 늘 이슈가 되는 '필수의료 고액배상'과 관련해 자신의 견해를 11일 밝혔다.
의료법연구회는 의료 분야에 관심 있는 판사들이 모여 의료재판에 대해 토론 및 연구하는 단체로, 300~400여명의 회원들이 속해있다.
차문호 판사는 "의료 관련 분야의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 등이 모여 어떻게 해야 의료재판을 잘할 수 있을까 연구한다"며 "또한 재판에서 의료 분야의 쟁점이 되는 부분 등을 추출하고 함께 토론해 새로운 분야를 연구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의료분야 재판을 진행하다 다른 분야로 떠나면 관심이 조금 멀어지지만, 연구회 회원은 400여명 정도"라고 말했다.
최근 들어 의료계에서 끊이지 않는 이슈는 의료사고와 관련된 '형사처벌 및 고액배상' 등이다.
특히 산부인과나 흉부외과 등 고위험이 수반되는 필수의료 영역에서 형사 처벌이나 고액의 손해배상액이 인정되는 판결이 발표되면, 의료계는 전공의 지원율이 급감하는 등 큰 영향을 받았다.
실제 지난해 유도분만 중 뇌 손상 산부인과 16억원, 뇌성마비 신생아 분만 산부인과 12억원, 대동맥 캐뉼라 탈락 병원 9억원 등 의사나 의료기관에 10억원을 상회하는 손해배상책임이 있다는 판결이 연이어 발표되며 의료계 공분을 샀다.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사건 후 의료진이 집단구속되며, 소아청소년과 전공의 지원율이 급감한 것 또한 의료계에서는 공공연한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 "의료진 수사·기소제한, 국민-의료계-정부 납득 가능한 접점 찾아야"
이에 차문호 판사는 "의료소송은 판사 개개인이 필수의료 중요성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판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피력했다.
그는 "판사 역시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의료계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길 바라지만, 동시에 국민의 생명과 신체를 지켜야 한다"며 "두 가지를 모두 지킬 수 있는 적정선을 찾으려고 노력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의료계 현실을 인식하면서 환자의 권리나 인권을 지켜야 한다"며 "모든 판사가 이를 염두에 두고 재판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판사가 최종판결을 하지만 이는 독자적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닌 법원의 의사들에게 감정 의견을 받고 이를 기반으로 판단하는 것"이라며 "책임 제한 역시 일방의 주장만 인정하지 않고 여러 의사 의견 및 논문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신중하게 판단하고 있다"고 밝혔다.
의료계가 지적하는 고액배상 문제 역시 해외와 비교했을 때 규모가 크다고 볼 수 없다는 의견이다.
차문호 판사는 "해외에 비하면 우리나라의 경우는 보상규모가 크지 않은 편"이라며 "환자나 피해자 입장에서는 반대로 배상액이 너무 적다는 의견도 많다"고 말했다.
이어 "손해배상액 규모는 꼭 의료 분야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 손해배상 체계와 함께 맞물려 있다"며 "큰 법률 체계가 있기 때문에 의료 분야만 특별히 다른 취급을 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필수의료 강화를 위해 추진하는 의료진 수사 및 기소 제한 정책과 관련해서는 "환자와 국민, 의료계 종사자들이 정부와 함께 충분히 의견을 나눠 접점을 찾아야 하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의료개혁특별위원회는 의료계, 환자·시민단체, 법조계 등 인사로 구성된 '의료사고심의위원회'를 신설해, 의료진의 중대 과실 여부를 판단한 뒤 수사기관에 의견을 제출해 중과실 중심의 수사 및 기소가 이뤄질 수 있도록 제한하는 방침을 구상 중이다.
차문호 판사는 "의사가 사고를 두려워하면 의료행위에 적극적으로 임하기 어렵고 더 나아가 필수의료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며 "정부는 필수의료 인력 유입을 위해 이러한 대책을 고민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법원 입장에서는 피해를 입은 환자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잘 이뤄지는 것 역시 간과할 수 없다"며 "어느 한쪽 편만 들어 일방적으로 갈 수 없기 때문에 의료인과 환자 단체 모두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차문호 판사는 의사와 환자 양측 모두가 수용할 수 있는 방법으로 '공적 기금 활성화' 등을 언급했다.
그는 "의료사고 대부분은 의사들이 고의로 불법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실수 등으로 인해 나타난다"며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기 때문에 필수의료 분야는 공적 기금 등을 활성화하는 방향을 고민해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피해자는 충분한 보상을 받으면서 의료진은 과실로 인한 엄청난 배상 부담의 공포를 벗어날 수 있도록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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