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그 뜨거웠던 여름, 세월이 흘러 기억은 조각나 뒤죽박죽이 되었지만 아직도 마치 어제일처럼 또렷이 기억나는 몇 장면이 있다. 태풍 속의 보라매 집회, 그리고 3주간의 휴업투쟁을 꼬박 채우고 처음 출근하던 날 아침 병원 현관문에 붙어있던 종이 쪼가리, 이 두 장면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서릿발 같았던 경찰의 수배령을 피해 몸을 숨긴 동지들은 가끔 전화를 해왔다. "안선생, 지금 광고마저 끊기면 이 투쟁은 끝나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광고는 끊기지 말고 계속해야 해!"매일 새벽 눈을 뜨면 의협으로 달려가 하루 종일 글과 씨름했다.
피신한 동료들을 대신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었다. 휴업 투쟁 첫 주에 이미 대열은 무너졌지만 난 병원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예고된 3주를 모두 채우고 병원으로 돌아가니 현관문에 종이 쪼가리 두 장이 붙어 있었다.
한 장은 정부의 업무개시명령서, 그리고 또 한 장은… '저희 병원은 휴업투쟁을 하지 않습니다. 병원 휴업으로 인해서 진료를 받을 수 없는 환자분들은 저희 병원으로 오십시오' 그리고 친절하게 약도까지 그려져 있었다.
투쟁의 국면에 의사들에게 죽일 듯이 적개심을 드러내는 국민도 많았지만 내 의지를 뒤흔들어 놓는 것은 그 국민이 아니라 차가운, 때로는 내 가슴 깊숙이 들어와 불쑥 칼을 들이대는 동료들이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짓을 하고 있나? 그렇게 마음이 흔들릴 때가 많았지만 나를 다시 붙들어 두는 것은 바로 내 옆의 동지들이었다.
자기 것부터 챙기는 사람은 투쟁에 앞장설 수가 없다. 나는 2000년 투쟁의 선도에 나섰던 그들의 순수함, 열정, 용기, 그리고 꺾이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사랑한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주수호 선생과 나는 2000년 의쟁투에서 만났다. 그해 봄 둘이 같이 수도권 대학을 거의 빠짐없이 돌아다니며 학생, 전공의들 상대로 강의를 하고 다녔다. 진료를 보다가도 학생, 전공의가 모였다는 연락을 받으면 문을 걸어 잠그고 한걸음에 뛰어갔다. 그렇게 기나긴 투쟁은 시작되었다.
첫 번째 직선 회장인 신상진 집행부에 박현승, 주수호, 조현근, 그리고 내가 의협 역사상 처음으로 상근으로 들어갔다. 보궐선거로 들어선 짧은 집행부였지만 우리는 많은 일을 했다. 투쟁 중에 가장 아쉬웠던 것이 의협의 정책적 역량이었다.
그래서 의료정책연구소를 만들었고 그 어디에도 참고할 만한 모델이 없어서 정책학자들을 쫓아다니며 의견을 구해 의료정책최고위과정을 만들었다.
제대로 된 둥지를 마련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던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을 의협 회관으로 불러들여 사무실을 내어주고 대전협 대표를 의협의 정책이사로 임명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였다. 그리고 의협 사무처에 처음으로 직원 평가 시스템을 도입했다.
주수호 선생이 회장에 당선되고 나서는 첫 번째로 한 일이 교수협의회와 병원의사협의회 조직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일이었다. 이때 처음으로 의협 교부금 항목에 교수협과 병원의사협의회 몫의 교부금을 배정하고 조직을 재건할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공중보건협의회 회장을 의협의 상임이사로 임명하기 시작했다.
주수호 집행부는 보궐선거로 들어선 탓에 임기 기간이 짧았다.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사무처를 개혁하려고 노력했다. 모든 걸 수기로 하며 언제든지 문제가 터질 소지를 가지고 있던 사무처의 회계, 결재 시스템을 모두 전산화했다.
그리고 직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성과급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내가 직접 네이버에 찾아가 지금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네이버 지식인 사업도 바로 이때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회원들을 끌어모아 바잉파워를 키워 병의원 운영에 도움이 될 것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가 바로 의사장터 사업이다. 의사장터를 협회의 이름으로 사업자 등록을 하고 삼성의 자회사였던 아미마켓코리아를 위탁사업체로 끌어들여 소모품 사업을 시작했다.
효과는 극명했다. 의사장터가 출범하면서 전국의 소모품 가격이 일시에 30% 정도 인하되었다. 그리고 세무법인과 노무법인과 계약해서 저렴한 비용의 세무서비스와 노무서비스도 제공하기 시작했다.
지난 20여 년 나는 주수호 후보를 가까이 지켜보았다. 의쟁투 대변인으로 의협회장으로 사회에 이름을 알리고 정치인들과 관계도 좋았기 때문에 정계로 진출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주수호 후보는 결코 한눈을 판 적이 없었다.
2000년 수많은 동지가 그랬던 것처럼 순수함과 열정, 그리고 끈기를 가지고 있다. 주수호 후보의 젊음은 교과서적 진료환경을 위해 바쳤다.
의협회장은 평시에도 적응 기간이 필요한 자리다. 전시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전시와 평시를 모두 겪은 경험을 가진, 의사가 전문가로 존중받고 환자도 행복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매진한 주수호 후보를 나는 지지한다.
그의 꿈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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