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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갈등 장기화되면 학술도 타락…약탈적 학술지 막아야"

발행날짜: 2025-01-09 05:30:00 업데이트: 2025-01-10 12:09:54

[학회라운지] 대한의학회 저널 JKMS 유진홍 편집장(부천성모병원 감염내과)
편집장이 본 의-정 갈등 1년…수술 건수 감소 등 양적 하락 이어 의료질 쇠퇴 목도

"학문 활동 자체가 쇠퇴해버렸고, 회복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골든타임이 지났어요."

내달이면 의-정 갈등으로 인한 전공의 집단 사직 사태가 1년째를 맞는다. 전공의의 공백은 병원에 유무형의 변화를 초래했다.

주요 암종 수술을 포함한 상급종합병원에서의 수술 및 수술 예약 감소, 사망자 증가는 표면적인 변화다. 전공의들의 부재로 인해 교수진과 남은 의료진들이 합병증 발생 가능성이 있는 검사나 치료를 기피하게 된 것 역시 심리적인 방어기제의 표면화.

정작 더 큰 문제는 수면 아래에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공의들의 사직으로 교수진의 진료 업무가 증가하면서 연구에 할애할 시간이 줄어들었다는 것. 이로 인해 학술대회 발표나 논문 투고 수가 감소하는 등 연구 활동이 위축되고 있다는 증언이 의학계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고 피부로 와 닿지 않는 변화이지만 장기적으로 미칠 파장은 상당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

대한의학회 저널 JKMS 편집장이 신년 사설을 통해 한국 의학계의 쇠퇴 우려에 대해 직접적인 목소리를 낸 것도 이례적인 현상이다. 연구 활동의 위축이 한국 의료에 미칠 영향은 무엇일까. 유진홍 JKMS 편집장(부천성모병원 감염내과)을 만나 의-정 갈등 이후 나타난 학술 영역에서의 변화 및 향후 전망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3일 한 번꼴 당직…"연구할 물리적 시간 확보 불가능"

JKMS 저널은 주간 단위로 발행된다. 변화의 측정 감도가 월간 저널 보다는 민감하다는 뜻. 의-정 갈등 이전만 해도 투고 논문에 대한 수정 기간 연장 요청은 드문 편이이었다. 지금은 어떨까.

대한의학회 저널 JKMS 유진홍 편집장(부천성모병원 감염내과)

유진홍 편집장은 "가끔씩 한두 번의 수정 기간 요청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최근엔 이런 요청이 눈에 띄게 늘었다"며 "이는 그만큼 연구자들이 논문 완성 이후 검토, 리뷰에 투자할 시간이 줄었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논문을 가장 활발히 쓰는 층은 주로 조교수나 부교수들인데 전공의들의 빈자리를 메꾸기 위해 이들이 최소 3일에 한 번씩은 당직을 서고 있다"며 "당직 시간까지 합쳐 36시간 연속 근무를 할 수 있는데 이런 경우 육체적으로 정말 아무 생각이 들지 않는 멍한 상태에 이른다"고 말했다.

그는 "보통 연구부터 논문 작성까지 1년에서 1년 반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데 현 상황에서는 연구를 위한 물리적인 시간 확보 자체가 안 된다"며 "의-정 갈등 이전에 진행됐던 연구들이 투고되고 있어 그간 저널 발간이 가능했지만, 집단 사직 이후엔 신규 연구의 착수가 상당히 어려워진 게 사실"이라고 우려했다.

이같은 우려는 최종 게재된 논문 수로도 확인된다. 제출한 투고 논문 수가 줄어들면 심사를 거친 최종 논문의 수도 덩달아 감소할 수밖에 없기 때문.

매주 평균 5~6편의 논문이 발표되던 2023년과 달리, 최근엔 일주일에 3편의 논문이 발표되고 있어 전년 대비 약 20% 정도 최종 논문이 감소한 것으로 보고됐다. JKMS는 공신력을 갖춘 대한의학회 저널이라는 점에서 그나마 형편이 나은 편이지만, 논문 심사에 대한 여력 부족 문제도 서서히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다.

유 편집장은 "의-정 갈등 이후 신규 연구가 어려워졌기 때문에 당장 올해 중순을 기점으로 급격한 투고 논문의 감소가 예상된다"며 "JKMS는 국제학술지이고 전 세계 연구진들이 투고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형편이 낫지만 분과나 국내 연구진에 의존하는 저널들은 상당한 어려움에 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는 "투고 논문 감소를 차치하더라도 대학교수들이 심사를 하기 때문에 심사의 정체 현상도 풀어야 할 숙제"라며 "그간 4명의 인력이 2~4주 동안 심사를 했지만 교수들도 당직을 서느라 심사가 제 때 마무리되지 못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세계 주요 학술지들도 한국 의료의 의료 상황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한국의 의료 시스템 붕괴를 우려하는 기고글이 란셋에 실린 것도 이를 방증하는 예"라고 강조했다.

■"현 상황 방치 땐 파국…약탈적 학술지 늘어날 것"

유진홍 편집장은 "논문이 줄어들면 어떻게든 사설이나 종설과 같은 컨텐츠로 볼륨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겠지만 장기적으로 이를 지속하긴 어렵다"며 "국제 저널의 경우 발간 규정 등이 있어서 이를 지키지 못할 경우 패널티를 받거나 인용지수(IF)가 하락할 수 있고 이는 결국 신뢰성 저하로도 이어진다"고 지적했다.

그는 "학술지도 경영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투고가 줄면 운영비 충당이 어려워 질 수 있다"며 "자본의 측면에서 보면 투고 촉진을 위해 심사 기준을 완화하는 식으로 대응하면 저널의 질적 하락뿐 아니라 심하면 타락을 불러올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질이 떨어지는 논문이 실리면 투고가 줄어드는 악순환에 빠진다"며 "그런 악순환의 고리가 장기화되면 최악의 경우 경영난에 빠진 일부 저널들은 약탈적 학술지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전망했다.

약탈적 저널(predatory journal)은 학술 출판의 신뢰성을 악용해 연구자들에게 논문 게재를 요구하는 등 품질 관리나 학문적 기준을 무시하는 출판사를 말한다.

유진홍 편집장은 신년 사설을 통해 한국 의료의 붕괴 가능성에 대해 우려감을 나타냈다.

주로 돈을 벌기 위해 논문 게재료를 요구하면서도 적절한 심사(peer review) 과정을 거치지 않은채 빠르게 논문을 출판하고 싶어하는 연구자들의 심리를 이용, '단기간 내 게재 보장'과 같은 말로 현혹한다.

이같은 전망은 억측이 아니다. 실제로 6일 저명한 국제학술지 NEJM은 "약탈적 저널에서 연구자를 보호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사설을 발간하며 경각심을 환기시킨 바 있다.

유 편집장은 "의-정 갈등 장기화에 따른 학술지의 타락, 흑화를 막을 방안을 구상해야 하는데 편집장의 입장에서 아무리 생각해도 갈등의 봉합 외에는 딱히 다른 대안은 떠오르지 않는다"며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미 한국의료의 쇠퇴가 현실화됐고 골든타임이 지나 안타까운 마음뿐"이라고 전했다.

그는 "학술의 질적 하락이 당장 환자들에게 피부로 와 닿을 정도의 불편함이나 위험을 초래하지 않기 때문에 한가로운 소리를 한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며 "다만 의학이란 생태계는 임상, 연구, 교육, 정책, 신의료기술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복합적인 시스템으로 각 요소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각 요소가 서로 유기적으로 맞물려 전체적인 의료의 질과 수준을 결정한다"며 "국내의 열정 넘치는 연구진들의 피와 땀으로 한국 의료와 학술단체들이 명실상부 세계적인 수준으로 올라섰는데 연구가 중단되면서 신뢰도와 명성의 하락도 불가피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상대편, 경쟁자가 있는 무대에서 연구가 1년이 뒤쳐지면 이는 10년이 늦어지는 것과 같다"며 "이같은 부정적인 영향은 누적 효과를 지닌다는 점에서 경각심을 가지고 의-정 갈등 봉합에 정부가 나서달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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