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식품의약품안전처 허가만으로 신의료기술의 시장 진입을 보장하는 '즉시 진입 제도'를 추진하자 전문가들이 부작용을 우려하며 강하게 반발하고 나섰다.
유효성을 입증하기 위한 근거 창출 연구를 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비급여를 보장하는 것은 의료 인공지능 기업의 일탈을 유도하는 위험한 시도라는 것이 이들의 지적이다.
대한영상의학회는 17일 온·오프라인을 통해 '진단보조 인공지능의 적절한 적용'에 대한 포럼를 열고 의료 인공지능의 올바른 활용을 위한 제도 개선 방안을 논의했다.
이 자리에서 전문가들은 정부가 추진중인 즉시 진입 제도를 포함해 신의료기술평가 유예제도 등 이른바 선진입 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합리적 개선 방안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발제를 맡은 가톨릭의대 최준일 교수(영상의학회 정책연구이사)는 정부가 선진입 제도의 허들을 점점 더 낮추고 있는 것에 우려를 표하며 심각한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정부가 최근 선진입 제도의 허들을 점점 더 낮추면서 제도가 왜곡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의료 산업 발전이라는 담론은 인정하지만 검증 절차를 훼손한다면 의료진은 물론 환자에게 큰 위해가 가해질 수 있다"고 꼬집었다.
일단 그는 신의료기술평가 유예제도가 2년에서 4년으로 연장된 근거가 부족하다는 입장이다.
진단보조 인공지능의 특성상 매우 짧은 시간에 많은 증례를 수집할 수 있는데도 굳이 2년을 더 늘려 기업의 수익을 보전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다.
최준일 교수는 "진단보조 인공지능은 단기간에 매우 많은 증례 수집이 가능하고 이를 통해 2년이면 충분히 유효성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며 "2년이면 충분한 시간을 4년으로 굳이 늘리면 기업 입장에서는 이 늘어난 유예기간을 유효성 검증보다는 수익 창출을 위해 악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특히 그는 정부가 추진중인 즉시 진입 제도는 신의료기술 평가와 검증에 대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붕괴시키는 시도라고 지적했다.
앞서 정부는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의료기기 인허가를 받은 신의료기술의 경우 별도 절차 없이 즉시 3년간 시장에 선진입하고 이 기간이 끝나면 유효성 등을 고려해 건강보험 급여 적용을 검토하는 '즉시 진입' 제도를 마련한 바 있다.
이 제도를 이용하면 과거 혁신 의료기술평가제도에서 의무화하고 있는 근거 창출 연구가 의무가 아닌 권고로 진행된다.
최 교수는 "선진입 제도가 만들어진 취지 자체가 시장에 진입해 임상적 근거를 쌓고 검증을 받으라는 의미인데 이 연구와 검증을 선택 조항으로 넣으면 어느 기업이 이를 진행하겠느냐"며 "근거 창출 노력은 하지도 않고 조기에 수익을 내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이미 일부 의료기관에서는 신의료기술평가 유예제도로 시장에 들어온 기술을 비급여로 청구하면서 이를 사용하지 않는 옵션을 삭제해 환자 선택권을 제한하고 있다"며 "즉시 진입 제도까지 시행되면 이러한 기업의 일탈을 막을 최소한의 장치도 없어지게 된다"고 경고했다.
다른 전문가들도 마찬가지 선진입 제도의 규제 완화에 우려를 표하며 검증 기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적어도 임상적 유효성을 입증하는 책임을 기업에 주고 이를 충족하지 못하면 퇴출할 수 있는 기전을 갖춰야 한다는 지적이다.
서울아산병원 박성호 교수(영상의학회 편집이사)는 "의료 인공지능이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매우 세밀하고 과학적인 도입이 필요하며 전문가를 통한 성능 모니터링은 필수적 요소"라며 "하지만 지금 정부가 추진하는 방향은 이와 정 반대로 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러한 모니터링과 검증을 간과하거나 생략하고 환자 중심적 고려가 아닌 상업적 부분을 강조한 근시안적인 제도는 의사와 환자 모두에게 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서울아산병원 서준범 교수도 즉시 진입 제도를 포함한 현재 선진입 제도 전반을 원점에서 다시 설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제도 개선 방안이 선진입 제도의 취지는 물론 건강보험 급여 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비판이다.
서준범 교수는 "현재 선진입 제도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바로 혁신의료기술 트랙과 평가 유예제도 트랙간에 이동이 가능하다는 것"이라며 "쉽게 말해 혁신의료기술 트랙에 올라가 3년간 비급여로 청구하다가 평가에 떨어질 것 같으면 트랙을 버리고 평가 유예로 갈아 타서 4년간 또 비급여를 받아낼 수 있다는 의미"라고 꼬집었다.
이어 그는 "특히 즉시 진입 제도의 경우 아무런 평가없이 비급여로 청구할 수 있게 해주고 심지어 평가에 떨어져도 시장에 계속 살아남을 수 있다"며 "퇴출 기전 자체가 없다는 의미로 선진입 제도의 취지는 물론 건강보험 급여 체계의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문제"라고 강조했다.
의료 소비자 입장에서도 즉시 진입 제도와 선진입 트랙은 재검토 돼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환자에게 검증이 안된 의료기기나 기술을 쓰는 것도 문제인데다 퇴출 기전이 없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녹색소비자연대 유미화 대표는 "신의료기술이 시장에 진입하는 것은 매우 신중하고 꼼꼼한 검증이 필요하다"며 "환자의 생명과 안전을 담보로 적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특히 의사 등 전문가들이 치료나 진료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을 내린 기기나 기술이 퇴출되지도 않는 상황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며 "환자 입장에서도 반드시 개선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이라고 못박았다.
기업 입장에서도 불순한 의도를 가진 기업들은 걸러내는 기전이 필요하다는데 동의하면서도 산업 발전을 위해 의학회 등 학계가 조금 더 힘들 보태달라는 의견을 전했다.
휴런 박찬익 부사장은 "인공지능 기업으로서 미뤄진 시험은 반드시 봐야 한다는데 100% 동의하며 검증을 통해 실효성에 맞게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해야 하는 것도 당연하다"며 "다만 우리나라 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에서도 수많은 기업들이 인공지능 분야에 뛰어들고 있는 만큼 근거 마련을 위해 노력하는 기업들만이라도 경쟁력을 가질 수 있도록 학계에서 가이드를 해주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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