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외적으로 어려운 경제 여건 속에서도 국민 건강과 국가 발전을 위해 헌신해 온 의료기기 산업계에 올해 '제19회 의료기기의 날'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지난해 4월 '의료기기법' 개정을 통해 5월 29일이 법정기념일로 공식 지정된 이후 두 번째로 맞이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의료기기산업이 단순한 제조업을 넘어 국민 생명을 지키는 국가 전략 산업으로서 그 위상이 제도적으로 정립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화려한 지표와 초라한 현장의 역설
그러나 우리 의료기기산업의 실상은 화려한 지표와 초라한 현장의 역설 속에 놓여 있다. 2024년 기준 생산액 11조 4,267억 원, 수출액 7조 1,700억 원을 기록하며 세계 시장 12위권으로 도약했으나, 국내 보건의료의 중추인 상급종합병원 내 국산 장비 점유율은 단 11.3%에 불과하다.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가 6조 원대 시장을 형성하며 성장을 견인하고 있음에도 연구개발(R&D) 성과가 임상 채택과 대형 시장 확대로 연결되는 구조는 여전히 민낯으로 남아 있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기술력이 부족하거나 의료진의 선택 문제로 치부될 수 없다. 의료기기는 일반 공산품과 달리 의사의 사용 경험과 장기간 축적된 임상 근거, 보험 체계 등이 결합해야만 선택받을 수 있는 특수한 시장이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산업은 우수한 제조 역량을 갖췄음에도 R&D 성과가 실제 구매와 수출 확대로 이어지는 전주기적 연결 고리가 끊겨 있다. 바로 이 지점이 지금 우리가 직면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며, 기술이 아닌 구조의 문제이다.
정부 지원의 한계와 전환의 시점
그간 정부 지원은 이 단절을 극복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지원 사업은 소액으로 분산돼 있고 부처 간 장벽으로 인해 분절적이다.
국산 의료기기 사용 활성화 예산은 전략 산업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할 만큼 규모가 작으며 실증과 보급 지원 역시 제각각 흩어져 있다.
규제 개선도 점진적으로 이뤄지고 있으나 개별 제품의 인허가라는 미시적 관점에 머물러 있다. 반면 디지털의료제품법 시행과 AI 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산업과 제도를 동시에 재편할 수 있는 창을 열어주고 있다.
지금은 단순한 제도 보완의 시기가 아니라 산업 구조 자체를 재설계해야 하는 전환의 시점이다.
방산 성공 모델, 의료기기에 맞게 재설계해야
우리가 주목해야 할 이정표는 한국 방위산업의 성공 사례다. 과거 내수용 무기 체계에 머물렀던 방산은 정부의 장기 투자, 국산 우선 획득 제도, 부품 국산화, 그리고 범정부 차원의 수출 지원 체계를 통해 세계적인 전략산업으로 탈바꿈했다.
방산은 국가가 최초의 수요자가 돼 성능을 보증하고 이를 바탕으로 해외 시장을 개척하는 전주기 모델을 구축했다. 다만 방산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은 위험하다. 방산의 수요자는 국가이지만 의료기기의 수요자는 환자, 의사, 병원, 보험자, 규제 기관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핵심은 동일한 방식이 아니라, 국가가 산업 전환의 가장 어려운 구간을 책임지는 구조를 의료기기 특성에 맞게 재설계하는 데 있다.
이미 주요국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미국은 혁신 의료기기 지정과 보험 적용을 연계하고 데이터 인프라를 결합하는 구조를 구축하고 있으며, 유럽연합은 의료데이터 활용 체계와 AI 규제를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일본 또한 전담 심사체계와 의료 DX를 통해 산업과 의료 현장을 연결하고 있다. 이들 사례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분명하다. 규제, 데이터, 보험, 연구개발이 하나의 정책 체계로 통합돼 있다는 점이다.
전주기 지원 체계 구축, 백년대계의 출발점
이제 우리도 방향을 선택해야 한다. 새로운 전략의 핵심은 국가가 단순한 규제자가 아니라 최초 수요 창출자이자 증거 인프라 조성자로 역할을 확장하는 것이다. 총리실 산하 국가전략의료기기위원회를 중심으로 부처 공동사무국을 운영하고, 정책·예산·조달을 하나로 묶는 통합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동시에 병원·기업·연구기관을 연결하는 임상실증 네트워크와 국가 의료데이터 연합망을 통해 산업 전반의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
특히 디지털 전환기에 발맞춰 데이터·AI 융합을 핵심 경쟁력으로 삼아야 한다. 단순한 데이터 접근을 넘어 연합학습이 가능한 구조, 표준화된 데이터 관리, AI 성능을 지속적으로 검증하는 체계를 갖춰야 한다.
아울러 공공병원이 국산 전략 품목의 최초 구매자가 돼 임상 근거를 축적하고 이를 민간 시장과 수출로 연결하는 혁신구매 및 조건부 수가 체계가 필요하다. 수출 전략 역시 단품 중심에서 벗어나 교육, 유지보수, 데이터 분석이 결합된 패키지형 진출로 전환해야 한다.
이런 전환은 단계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향후 1~5년은 법·제도 정비와 데이터·실증 인프라 구축에 집중하고, 5~10년은 공공구매와 수출 확대를 통해 산업 규모를 키우며, 이후에는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하는 구조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향후 10년간 공공투자 18조 원을 포함한 총 40조 원 규모의 전략적 투자가 필요하다. 이는 단순한 지원이 아니라 산업 구조를 바꾸기 위한 최소한의 국가적 선택이다.
국가 전략산업으로의 전환은 경제적 이익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감염병 위기나 공급망 불안 속에서 필수 의료를 자국 기술로 유지할 수 있는 역량은 국가 보건 안보와 직결된다.
동시에 의료 AI와 디지털 기술은 고령화 사회의 의료 서비스 문제를 해결할 핵심 수단이기도 하다. 이제는 국가가 시장을 설계하고 산업을 연결하는 구조로 전환해야 한다.
정부는 의료기기·데이터·AI 융합산업을 백년대계 국가전략으로 선포하고 입법과 예산으로 이를 뒷받침해야 한다. 11.3%라는 국산 채택률의 장벽을 넘어서는 길은 오직 전주기 지원 체계 구축에 달려 있다.
우리는 지금 첨단의료기기산업의 새로운 전환점 앞에 서 있다. 기술 혁신 그 자체를 넘어, 그 성과가 임상 현장과 국민의 삶에 실질적으로 연결되고 다시 산업의 성장과 경쟁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 지금 이 시대의 과제다.
제19회 의료기기의 날이 대한민국 의료기기산업의 가치와 가능성을 다시 확인하고, 세계 시장을 향한 도전을 더욱 치밀하고 단단하게 이어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원주의료기기산업진흥원은 산업계와 함께 우리 의료기기가 국민의 건강을 지키고 세계 시장에서 신뢰받는 경쟁력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맡은 역할을 성실하고 흔들림 없이 다해 나갈 것이다. 의료기기산업 발전을 위해 애쓰는 모든 종사자 여러분의 건승과 발전을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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