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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 보는 의사에서 전산 보는 의사로

손문호 칼럼위원(정형외과)
발행날짜: 2026-09-28 05:00:00 업데이트: 2026-09-30 16:3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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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문호 대한병원의사협의회 정책자문위원
메디칼타임즈 칼럼위원

[메디칼타임즈=손문호 칼럼위원]" 진료기록 강화가 필수의료의 새로운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는 12월부터 전자의무기록을 단순 열람한 경우에도 누가 언제 환자의 기록을 열어봤는지 접속기록을 보관하도록 제도가 강화된다.

환자의 개인정보를 보호하고 진료와 관계없는 무단열람을 막자는 취지는 옳다. 의료인 역시 환자의 민감한 정보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의료현장에서 바라보면 한 가지 걱정을 지울 수 없다.

우리는 환자를 잘 보는 의사를 만들고 있는가, 아니면 전산기록을 잘 남기는 의사를 만들고 있는가.

의료는 언제나 기록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특히 응급실, 중환자실, 수술실과 같은 필수의료 현장은 더욱 그렇다. 환자가 출혈하고 있다면 먼저 지혈해야 한다. 혈압이 떨어진다면 먼저 수액과 약물을 투여해야 하고, 심정지가 발생하면 기록보다 심폐소생술이 먼저다.

환자의 생명 앞에서는 당연히 처치가 기록보다 앞선다.

하지만 의료분쟁이 발생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몇 시 몇 분에 의사가 EMR을 열었는지, 언제 처방을 입력했는지, 기록을 언제 추가했는지가 모두 남는다. 실제 진료과정보다 전산기록의 시간표가 의료행위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예를 들어 새벽에 간호사로부터 환자의 상태 변화를 보고받은 의사가 전화로 즉시 처치를 지시했다고 하자. 간호사는 처치를 시행하고 의사는 다른 응급환자를 진료한 뒤 조금 늦게 전산처방을 입력할 수 있다.

현장에서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몇 년 뒤 법정에서는 EMR에 남아 있는 시간만 놓고 "처방보다 처치가 먼저 이루어졌다"고 문제 삼을 수도 있다.

실제 진료와 전산상의 진료가 달라지는 순간이다.

진료기록을 보완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의사는 환자 진료가 끝난 뒤 빠뜨린 내용을 확인해 추가할 수도 있고, 수술이나 응급처치 후 보다 상세한 경과를 기록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록의 수정과 추가 이력이 모두 남고 이것이 의료분쟁에서 중요한 증거가 된다면 의사는 정상적인 기록 보완조차 두려워하게 된다.
기록을 바로잡는 행위와 기록을 조작하는 행위는 분명히 다르다.

그럼에도 의료분쟁 과정에서 "사고 이후 기록을 수정했다"는 사실 자체가 의사에게 불리한 정황으로 제시되는 순간, 의사는 정확한 기록보다 자신에게 불리하지 않은 기록을 고민하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이것이 필수의료에 미치는 영향이다.

필수의료에는 불확실성이 많다. 환자의 상태가 급변하고, 여러 의료인이 동시에 치료하며, 순간적인 판단이 반복된다. 수술과 응급처치에는 사후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하기 어려운 임상적 판단도 존재한다.

그런데 모든 판단을 몇 시 몇 분 몇 초의 전산기록으로 재구성해 책임을 판단한다면 의사에게 가장 안전한 선택은 무엇일까.

환자를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것보다 기록을 완벽하게 남기는 것이 될 수도 있다.

의사는 처치를 시작하기 전에 컴퓨터를 찾고, 전화로 지시하기 전에 처방을 입력하며, 환자의 상태보다 자신의 기록이 어떻게 남을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이른바 '방어진료'를 넘어 '방어적 기록'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런 의사를 '전산의사'라고 부르고 싶다.

수술을 잘하는 의사보다 수술기록을 잘 작성하는 의사가 안전하고, 응급처치를 잘하는 의사보다 처방시간과 기록시간을 완벽하게 맞추는 의사가 법적으로 안전한 의료환경은 정상적이지 않다.

의료의 디지털화는 필요하다. 기록의 투명성을 높이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의료의 본질은 전산이 아니라 환자다.

정부가 전자의무기록 관리를 강화하려 한다면 동시에 필수의료 현장을 보호하는 장치도 마련해야 한다.

응급상황에서는 처치 이후 전산입력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점을 제도적으로 인정해야 하고, 실제 처치시각과 전산입력 시각을 구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전화오더와 구두오더, PRN 처방에 대해서도 현실에 맞는 표준기준이 필요하다.

정상적인 진료기록의 추가기재와 허위기록 변경을 구별하는 원칙도 보다 명확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다.

EMR을 열었다는 사실이 곧 그 환자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기록이 늦었다는 사실이 곧 진료가 늦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 원칙이 무너지면 EMR은 환자를 위한 진료기록이 아니라 의사의 책임을 추적하는 블랙박스로 변할 수 있다.

정부는 필수의료를 살리겠다고 한다.

그렇다면 필수의료 의사가 환자 앞에서 컴퓨터 화면부터 걱정하게 만드는 제도는 아닌지 함께 살펴야 한다.

좋은 의사는 기록을 가장 잘하는 의사가 아니다. 위급한 순간 환자에게 가장 필요한 판단과 처치를 할 수 있는 의사다.

환자를 살리는 손보다 전산을 입력하는 손이 더 중요해지는 의료제도를 만들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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