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의 화두는 단연코 '힐링'이었다.
방송 프로그램인 <힐링캠프>를 비롯해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과 같은 힐링 코드를 주제로 한 베스트셀러들은 모두 잠시 멈추어서 우리 자신을 둘러봐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잘 먹고 잘 사는 문제가 화두였던 웰빙의 시대가 가고 이제는 아픈 마음과 몸을 치유해야 한다고 하는 시대.
저수가의 3분 진료 환경, 개원 후 무한 생존 경쟁에 사로 잡혀 뛰어오기만한 의사들의 상처는 무엇일까.
그 상처를 보듬는 치유의 시간을 통해 새로운 2013년을 맞이하고자 의사들이 올해 마지막 산행길에 올랐다.
춘천 금병산행 버스에 몸을 싣다
도로 곳곳에 빙판길이 생길 정도로 한파가 기승을 부린 23일.
압구정에 모인 서울시의사회 의사산악회 회원 40여명이 춘천 금병산 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올해 마지막 산행 장소로 택한 금병산은 산세가 험하지는 않지만 눈길 산행이 예상되는 만큼 산악회 회원들은 마스크, 아이젠 등 방한 장비로 중무장을 하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면서부터 박근혜 후보의 당선부터 2.4%에 그친 내년 수가 결정, 환자들의 불만까지 의료계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끊이질 않았다.
한 회원은 수가가 고작 2.4%가 올랐지만 진찰료 몇 백원 인상에도 고성을 치는 노인 환자들이 많아 벌써부터 어떻게 대처할지 머리가 지끈거린다고 고개를 저었다.
다른 회원은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봤다면서 의료계가 현 상황보다 더 어려워지지만 않기를 바랄 뿐이라고 말을 아꼈다.
하나 같이 희망보다는 우려와 불안에 시달리는 모습에서 그간의 노고를 엿볼 수 있었다.
2시간여를 달려 도착한 춘천, 김유정 역 앞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한 후 금병산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새해 소망요? 진료에만 전념하고 싶습니다"
산행 중간마다 산악회 회원들에게 의료계를 어렵게 하는 문제들과 새해의 소망을 말해달라고 부탁했다.
회원들은 이구동성으로 "제발 진료에만 전념하게 해달라"는 푸념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포에서 진료를 보고 있는 이재일 원장은 "의사 수가 너무 많고 저수가가 10년간 이어지다 보니 경영상 어려움이 제일 크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의사들이 돈 몇 천원에 예민해질 정도로 진료만 열심히 봐서는 안되는 시대가 됐다"면서 "제발 내년에는 경제가 잘 풀려서 온 국민이 잘 사고 병의원 문턱도 낮아졌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관악구의 조해석 원장도 경영난을 호소했다.
그는 "진료비가 너무 낮고 의원 수도 많아 이젠 아픈 사람보다 피부, 미용 등 멋내는 사람을 봐야만 수익이 남는 구조가 됐다"면서 "의사들이 잘 사는 것으로 보이지만 진료실에서 마주하는 실제 삶의 질은 매우 열악한 수준"이라고 밝혔다.
최고령 참가자로 노익장을 과시한 이상섭 고문(가운데).
환자가 없는 게 가장 큰 고민이라는 노원구 백인석 원장에게 후배를 위한 희망찬 말 한마디를 부탁했지만 대답이 나오기까지는 한참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는 "개원 환경이 너무 어려워 희망찬 말을 하는 것 조차 조심스럽다"면서 "후배들이 제약과 리서치 회사 등에 취직하는 것처럼 스스로 길을 개척해 나갔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무항산무항심(無恒産無恒心)
서울시의사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박상호 원장은 대뜸 '무항산무항심'이란 글귀를 들려줬다.
이는 맹자에 나오는 말로 경제적 안정(항산)이 없으면 항상 바른 마음(항심)을 가질 수 없다는 뜻.
박 부회장은 "동네 슈퍼처럼 의원들이 많아 의사들이 인술과 의술을 따질 여유가 없을 정도로 생존 경쟁이 치열하다"면서 "안정적인 수입원이 없으니 의술과 인술을 펼칠 항심마저 사라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가장노릇을 하기에도 벅찬 현실에서 의사들의 단합만 강조하는 것은 그저 '이상'에 불과할 뿐"이라면서 "부디 새해부터는 모두 공동체 의식을 갖고 정책 공부와 함께 의료계 미래를 고민해 봤으면 한다"고 밝혔다.
연재성 산악대장은 "소신 진료를 할 수 있는 환경만 조성됐으면 한다"고 새해 소망을 피력했다.
그는 "정부가 환자의 치료의 질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건보 재정의 관리, 감독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서 "의사들이 로봇도 아닌데 어떻게 획일적인 진료 기준을 강요하는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박병권 산악회 회장은 "올해는 대정부 투쟁 휴진 참여 문제로 회원들 간에 갈등이 있었다"면서 "선후배간 대화의 통로가 많이 없고 타 전공간 교류가 없는 점이 이런 갈등의 한 원인이 아니었는지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그는 "의사들이 환자만 치료하다보니 자기 자신도 힐링이 필요하다는 것을 잊고 살 때가 많다"면서 "새해에는 등산 모임에 더욱 많은 회원들이 참여해 선후배간 돈독한 친분을 쌓았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3시간에 걸쳐 금병산 정산에 올랐다. 의사들의 새해 소망은 그저 "진료에만 전념하게 해달라"는 너무나도 소박한 것이었다.
2013년 새해에는 그 희망이 이뤄지게 될까.
78세의 최고령으로 산행에 오른 이상섭 고문을 후배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잡아주며 정상까지 오르는 모습에서 희망을 엿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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