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대한의사협회는 의사의 방송출연에 따른 부작용 노출에 따라 방송 출연 가이드라인 제정 돌입을 알렸다.
아직 안에 불과하지만 가이드라인에는 방송 출연시 가운 착용 금지, 홈쇼핑 채널 출연 금지 등의 파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의협이 강도 높은 자구책을 들고 나온 이유는 방송에 출연한 이른 바 '쇼닥터'들이 간접광고를 통해 건강기능식품을 추천하거나 검증되지 않은 시술을 소개하는 등의 간접·과장·허위 광고로 국민 피해를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이드라인 제정 소식에 방송 출연으로 의학 지식 전달에 앞장서 온 의사들의 생각은 어떨까. 방송에서 잔뼈가 굵은 인제대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 강재헌 교수를 만났다.
의사들도 말리던 방송 출연, 지금은 병원장도 OK!
"자, 녹화 들어갑니다. 큐!"
강렬한 헤드라이트 불빛이 그의 머리 속을 하얗게 지운다. 당황해서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두 어 시간.
"괜히 나왔다"는 생각이 온통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진땀을 쏙 뺀 끝에 '녹화 끝' 싸인이 떨어진다. "아까 대본 연습할 때까지만 해도 잘 됐는데…" 입에 붙지 않은 대본이 못내 아쉽다.
호된 신고식 이후 20년 가까이 지났다. 방송 출연이 지금까지 이어질 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의 얼굴을 기억해 낸다. TV에서 봤다고 먼저 안부 인사를 건네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그 흔한 싸인 한장 없지만 그는 방송에서 잔뼈가 굵을 대로 굵은 중견이 됐다. 강재헌 교수가 회상하는 당시의 풍경이다.
"당시 방송 출연에 대해 의료계 내부에서조차 부정적인 시선이 많았습니다. 의사가 굳이 왜 저런 프로그램에 나와야 하냐는 것이죠. 사실 당시에는 의학 정보 프로그램이 영향력도 없었죠."
그의 말대로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구색 맞추기 프로그램에 꿔다 놓은 보리자루 마냥 앉아 있는 일이 종종 생겼다.
강 교수는 "당시에는 교양 프로그램에 대한 의무 비율이 있어서 의학 정보 프로그램은 그야말로 구색 맞추기 정도였다"며 "이른 아침이나 자정 무렵 애국가 방영 앞뒤로 해당 프로그램이 편성돼서 애국가 프로그램이라는 말까지 있을 정도였다"고 웃었다.
방송 출연을 이어가기로 결정한 것은 "의사가 진료실에서 환자를 보는 일도 중요하지만 방송 매체의 발달과 맞물려 미디어를 통한 의사의 역할도 커지겠다"는 혜안이 작용했다.
90년대 이후로 강산이 두 번 바뀌었다. 먹고 살만 해지니까 사람들의 관심사도 자연스레 웰빙에 초점이 맞춰졌다.
의학 정보 전달 프로그램이 시청자의 욕구를 반영하면서 재미나 전문성을 가미하기 시작했다. 의학 정보 전달 프로그램이 장수 프로그램으로 등장하던 순간이었다.
<비타민>, <생로병사의 비밀> 등 그가 출연한 의학 정보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으면서 그를 알아보는 환자들의 수도 늘어갔다. 의사의 방송 출연을 우려하던 목소리가 수그러들면서 선배나 병원장마저도 방송 출연을 통한 의사의 역할에 대해 인식을 바꿨다.
"10년 전 '뱃살을 줄여라'라는 캠페인을 통해 복부비만의 허리 둘레 기준을 알리는 작업을 1년간 진행했습니다. 당시에는 복부비만이라는 용어도 생소하던 때인데도 캠페인이 끝날 무렵에는 국민들 대다수가 복부비만 용어와 기준까지 줄줄 외우더군요. 이런 캠페인을 진료실에서 혼자 했으면 1천년 걸렸을 거에요."
"웃기는 강사가 명강사, 의학 방송이 꼭 진지해야 하나"
프로그램의 시청률이 5%만 되도 500만명이 보게 되는 셈이라고 강조하던 강 교수는 그만큼 방송의 올바른 지식 전달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재미와 흥미 위주로의 방송 출연이나 자기 PR과 제품 홍보에 열을 올리기 위한 출연이 결국 의사라는 전문가 집단의 신뢰성에 큰 흠집을 낼 수 있다는 우려다.
"10년 전에 연예인의 건강 상태를 측정하는 프로그램에 나갔더니 대학 교수가 그런 데 나가도 되냐는 말들을 하시더라구요. 요즘은 저명하신 분들도 방송에 많이 나갑니다. 하지만 본질은 확실히 지켜야 합니다. 엔터테이먼트적인 요소가 가미될 순 있지만 흥미 위주의 접근이 팩트 전달의 순기능을 왜곡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의학 방송이 진지하고 무게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한다는 강 교수는 "방송이 시청률을 위해 재미라는 요소를 포기하긴 어렵지만 재미를 위해 의학적 팩트 전달을 왜곡해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는 "학생들을 졸게 만드는 학원 강사보다 재미있게 머리 속에 쏙쏙 박히는 강의를 하는 강사가 명 강사다"며 "그런 강사가 재미를 위해 거짓 정보를 전달하지는 않는 것처럼 의사들도 지켜야 할 최소한의 윤리가 있다"고 역설했다.
미디어의 발달과 이를 활용한 정보 전달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순기능은 살리고 역기능은 막아야 한다는 소리다. 상업적 목적의 출연을 배제할 수 있는 윤리 규정 등의 최소한의 안전 장치 마련이 전체 의사들의 신뢰도 유지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게 강 교수의 판단이다.
강 교수는 "가장 우려되는 점은 국민들이 올바른 지식을 전달하는 의사들보다 흥미와 재미 위주로 툭툭 내뱉는 쇼닥터의 말을 더 믿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며 "그런 의미에서 의협의 가이드라인 제작이 최소한의 견제 장치가 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팩트 왜곡이나 오락성이 강조되는 프로그램의 의사 출연은 규제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며 "다만 자칫 의사의 방송 출연 자체가 금지되는 현상을 막기 위해 규제와 허용의 밸런스를 잘 맞춰야 한다"고 당부했다.
"특정 사안에 대해 올바른 의학 지식을 반복해서 전달했더니 처음 온 환자도 그런 내용을 알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방송을 통한 건강 지식 전달은 그 파급력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방송의 파급력을 개인의 이익을 위해 쓸 지,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게 쓸 지는 방송 출연에 앞서 진지한 고민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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