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담임선생님께서는 일주일에 한 개씩 칠판 귀퉁이에 한자 숙어를 써 놓으셨다. 그리고는 아침 자습시간마다 그것을 10번씩 쓰게 하고 그 뜻을 설명해 주셨다. 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게 '선악개오사(善惡皆吾師)'라는 말이다. 세상 사람의 착한 짓이나 악한 짓이 모두 자기 수양(修養)의 거울이 된다는 말로 '착한 일과 나쁜 일이 혹은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이 모두 나의 스승이다'라는 뜻이다. 살아가면서 이 말이 너무나 좋은 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특히 환자를 보면서 더더욱 실감한다.
세 사람이 길을 가다보면 어떤 사람은 존경스럽거나 배울 만한 행동을 한다. 그 사람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하는 일마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신경을 거스르게 한다. 그럴 경우 저러면 안 되겠다,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겠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즉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좋은 사람이든 나쁜 사람이든 나에게 스승이 된다는 것이다.
환자를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어떤 환자를 보면 화가 나고, 하루 종일 그 사람 때문에 스트레스가 되지만 결국 그 환자 덕에 점점 모난 인간에서 둥근 인간으로 내가 변하게 된다. 나를 믿고 치료를 받으러 온 것인데 고마워하기는커녕 그 사람의 태도나 말투 때문에 화가 나고, 싸우기까지 한다.
환자는 그냥 온 것이 아니다. 여러 사람에게 물어보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여러 병원 중 선택해서 온다. 내가 그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그 환자의 태도 문제가 아니라 나의 능숙함이 문제인 경우가 많다.
개원 초창기에는 '내가 낸데!'하면서 기고만장했었다. 겸손하지도 않았고, 경험도 적었으며 인격도 덜 되었었고, 귀도 순하지 않았다. 그냥 말을 해도 환자들이 나의 전라도 억양이 남아있는 말투가 무뚝뚝하고 불친절하게 느껴진다고 인터넷에 글을 올렸다. 그제서야 '내 말투가 불친절해 보인다'라는 것을 깨달았다.
화를 내거나, 감정조절을 못 해서 귀한 환자 한명을 쫓아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날엔 진료하는 내내 후회하고 또 후회하고, 하루 종일 그 행동 하나 때문에 반성하거나 나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었다. 그런 시행착오를 매일 겪으며 20년이 흘렀다.
'더 나은 방법이 없었을까? 더 나은 말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신의 한수처럼 행동할 수 있지 않았을까?'를 고민하면서 환자들을 분류하고, 환자 유형에 따른 행동 방침을 정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귀가 순해지고, 환자보다 한수 위의 말이나 행동을 한다고 자부한다. 물론 1년에 1~2번 정도는 감정 조절을 못하는 일이 생겨 아직도 '하수'라는 생각을 하면서 반성하고, 다시 작전을 짠다.
사람들은 의사가 우아한 직업인 줄 안다. 의사가 되면 대접받는 줄 안다. 하지만 의사나 슈퍼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다른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나 민원을 해결해야 하는 공무원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고객을 대하는 일은 모두 어렵다. 더 어렵고, 덜 어려운 일은 없는 것 같다. '고객이 왕'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왕 대접을 해줄 수 없는 고객도 많다.
의료업은 서비스업이기 때문에 모든 고객에게 무조건 친절해야 한다고 말을 한다. 의료를 서비스업처럼 생각하고 일을 하자니 속이 터지는 일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개원 초창기에는 직원들과 한탄을 위해 술도 많이 마셨다.
환자에 대한 생각이 바뀌게 된 결정적 계기는 2년 전, 내가 직접 환자가 된 후였다. 한 달간 병원에 입원해 있어 보니 남을 배려할 마음의 여유도 없고, 신경질적이 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때 느꼈다. '의술도 물론 중요하지만 환자에게는 따뜻한 말 한마디, 친절한 태도, 배려하는 마음 등 서비스정신이 있어야겠구나!' 하는 것을 말이다. 이제는 환자가 어떤 행동을 해도 나는 그 사람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의료는 의술과 서비스가 결합된 형태이어야 한다.
고객의 행동을 보고 스트레스만 받고, 포기해 버리면 그 행동을 통해서 배우지 못한다. 그 고객의 행동을 분석하고, 그런 유형의 사람을 어떻게 대할지 고민하고, 고민한 만큼 성숙한 대처를 하면 그만큼 더 성숙해진다. 즉, 고객이 나의 스승이 되는 것이다.
어떤 행동에서든 배우려는 마음으로 시행착오를 줄이고, 어떤 것은 그렇게 해야지 하는 것을 배우고, 어떤 것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지 하는 것을 배우면, 우리가 스트레스를 덜 받고 성숙해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래서 오늘도 배움의 자세로 고객을 대하고 있다. 나를 인간적으로 성숙시킨 것은 나에게 오는 나의 고객이고, 나의 환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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