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히 눈금이 올라가는 수은주가 여름날의 불볕 더위를 예고하는 어느 날. 이미 진료시간이 끝난 은평구의 한 정형외과병원에 승용차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내린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입은 신사들은 약속이나 한 듯 엘리베이터로 모여들었고 아무런 표식조차 없는 꼭대기층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삭막한 콘크리트로 지어진 7층짜리 병원 건물. 하지만 그들을 따라간 건물의 옥상에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저녁 무렵 아직은 봄이 가지 않았다며 외투를 벗게 하는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어오는 그곳에는 잔디 위에 놓여진 테이블과 음악 고소한 음식냄새가 오감을 자극하고 있었다.
그 곳에 삼삼오오 모여앉은 신사들은 가지런히 놓여있는 와인잔과 식기들을 정리하며 안부를 물었고 아직 공식적인 시작 시간은 다가오지 않았지만 어느새 테이블은 가득 차 있었다.
어느새 서로간의 회포로 어수선해질 찰나. 마이크를 든 한 남자의 말로 장내는 한 곳으로 시선이 쏠렸다. 바로 은평구의사회 총무이사 하재성 원장이었다.
행사의 공식 시작을 알린 그는 곧바로 와인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 같은 자리를 만들어 주신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그 중에서도 와인 마스터로 수많은 와인을 기증해 주신 분이 있습니다. 그분께서 여러분들에게 와인 스토리를 들려주실겁니다. 박수로 맞아주시죠."
이 얘기에 수줍게 일어나는 사람. 그는 바로 은평구의사회 정승기 회장이었다. 와인동호회 모임인 만큼 한껏 회장을 치켜주는 하 원장의 발언에 그의 얼굴은 발그레 상기돼 있었다.
"아 저는 와인 마스터도 아니고 그냥 마시는걸 좋아하는 사람인데..."라며 말을 시작한 그는 이렇게 모여든 회원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환영사를 이어갔다.
"회장이 되어서 처음으로 마련한 행사인데 이렇게 많은 분들이 자리를 채워주시고 즐겁게 보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의료계에 많은 현안이 있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함께라는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얘기를 나누며 오늘 만큼은 함께라는 동지애를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정 회장의 말이 끝나면서 본격적인 와인데이 모임이 시작됐다. 한쪽에 놓은 세미뷔페에서는 음식의 뚜껑이 열리고 스피커에서는 분위기 좋은 음악들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날 서버를 자청한 법제이사 엄윤 원장은 자리를 돌며 식전 샴페인을 따르기 시작했고 테이블마다 여기저기서 건배를 외치는 목소리들이 커져갔다.
이날 마련된 와인은 총 4종. 식전 샴페인과 화이트와인, 레드와인으로 이어지는 코스로 구성돼 있었다.
와인동호회라고는 하지만 와인에 대한 지식은 그리 중요치 않았다. 와인 레이블을 보며 와인의 스토리를 얘기하는 원장들도 있었지만 "맛있으면 된거 아니냐"며 함께 하는 자리에 의의를 두는 원장들도 많았다.
그래도 명색이 와인동호회인 만큼 곳곳에 숨어있는 고수들이 설명을 자처하고 나섰다. 엄윤 이사를 비롯해서 하재성 이사도 테이블을 돌면서 와인의 특성을 설명했고 다음에 올 와인에 대한 예고도 잊지 않았다.
자리를 마련한 정승기 회장도 이를 거들었다. 그 또한 별도의 와인동호회 회장을 10년이나 지낸 강호의 고수. 왠만한 와인은 그의 머리와 혀 끝에 이미 기억돼 있었다.
"와인이 주는 매력은 다양성이에요. 그 다양성 만큼 많은 얘기가 있죠. 그 맛에 와인동호회 회장을 10년이나 했어요. 그래서 은평구의사회 회장을 맡으면서 이 자리를 만든거고. 그러고보니 은평구에도 와인 고수들이 많더라고요. 이번 기회에 알게되고 친해지고 그런거죠. 재능 기부도 하고."
실제로 이 자리는 수많은 은평구의사회 회원들의 기부로 이뤄졌다. 부족한 와인 몇병을 구입한 것 외에는 예산도 그리 들지 않았다.
장소는 은평구의 대부격인 문병철 원장이 자신의 병원 건물 옥상에 마련된 옥상 정원을 흔쾌히 제공했다.
와인은 정승기 회장을 비롯한 임원들과 숨어있는 와인 고수들이 기부했다. 나머지는 학술대회와 연수강좌 등을 통해 얻어진 수익금 일부로 충당했다.
이날 멋들어진 단어들로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킨 송호석 원장도 그 중 하나였다. 그는 숨어있는 와인 고수가 아니라 자타가 공인하는 와인 고수.
이미 마스터 소물리에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데다 한국 국제 소물리에협회 고문을 맡고 있기도 한 그는 이날 다양한 이야기들로 자리를 채워줬다.
"와인은 하늘의 별처럼 많고 코르크를 따는 기대감은 어떤 것으로도 비교할 수가 없죠. 음식을 먹으며 코를 쓸일이 그리 많지 않지만 와인은 코로 마시는 음식이에요. 여러분 향을 한번 맡아보세요. 그 향이 별처럼 많은 와인을 대표하는 겁니다."
그렇게 한 모금의 술이 들어가고 그의 말은 이어졌다. 과학자인 의사답게 와인도 공부하며 마셔보자는 무언의 압박이다.
"와인은 소주, 맥주와 달라요. 공부하고 마셔야 맛있게 먹는거에요. 적어도 기본적인 품종과 어울리는 음식은 알고 먹어야 합니다. 와인의 50%는 향이고 공부고 음식과의 궁합이에요. 그렇다면 나머지 50%는 무엇일까요. 누구랑 마시느냐죠. 좋은 사람과 마신다면 어느 와인이건 그게 중요하겠나요."
그렇게 숨어있는 와인 고수들의 설명이 이어지면서 어느 덧 뉘엿 뉘엿 하던 해는 그 모습을 감추고 약간은 싸늘할 수 있는 밤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준비된 조명이 켜지고 술기운이 무르익어 갈때 쯤 회원들의 목소리는 그 어느때보다 고조되고 행복감에 젖어있었다.
"강남구 의사회도 서초구 의사회도 이런건 못할꺼야. 이게 은평구의 매력이지. 얼마나 멋있어. 나는 은평구의사회가 자랑스러워."
어느 회원의 흥분된 목소리처럼 밤이 깊어지는 가운데서도 회원들은 아쉬움에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어느덧 준비한 와인도 떨어져가고 음식도 이미 바닥을 드러낸 뒤였지만 그 후로도 외투를 걸쳐입은 신사들의 이야기는 끝이날 줄 몰랐다.
"투쟁도, 협상도, 수가도 모두 중요하고 꼭 나눠야할 얘기에요. 하지만 언제나 그런 이야기들로 우리 삶을 채울수는 없잖아요. 그 어떤 일이든 서로 믿고 의지하면서 똘똘 뭉쳐야 가능한 일이에요. 와인 하나로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긴 어렵겠지만 또 하나의 시도라고 생각해요. 하나씩 하나씩 한번이라도 더 얼굴보고 얘기하면서 서로를 알게되면 저절로 신뢰와 협동이 쌓이는거 아닐까요."
정승기 회장의 말처럼 그날 그 신사들의 모임은 단순히 와인향에 취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은 와인이 안맞는다며 스스로 소주병을 들고 맥주캔을 들고 자리한 그들은 어쩌면 세상에서 점점 밀려나는 의사끼리라도 사람의 향기를 그리워 했을지 모를 일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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