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 학기가 시작하는 무렵인 3월 초, 슬로베니아의 작은 마을 포르토즈에서는 전 세계 136개국의 의대생들이 모이는 세계의대생협회연합(International Federation of Medical Student Association) 총회가 일주일간 열렸다. 한국에선 나를 포함한 6명의 작은 파견단이 대한 의과대학/의학전문대학원 학생협회와 나라를 대표해 참석했다.
총회에서는 매일 적게는 40개에서 많게는 60개의 안건이 상정되고 이를 토론하기 위한 낮 시간과 투표하는 저녁 시간이 5일 동안 반복된다. 안건의 종류로는 각 나라의 정부와 국제보건기구와 같은 국제기관 등에 전달하는 정책 제안, 국가 가입 및 퇴출, 헌법 및 회칙 개정, 임원진 선출 등 매우 다양했다. 그 외에도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건강 관련 주제들이 낮이나 밤이나 회의장과 식탁에 올랐다.
세계의대생연합협회 총회에서만 찾을 수 있는 특별한 점들도 있었다. 그중에 하나는 모든 나라가 투표를 하기 전에 안건에 대해 최종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메일 서버를 통해 미리 공유하고 그 자리에서 낭독한다는 것이다.
어느 때는 첨예한 정치적 발언들이 오가기도 했고 거의 모든 나라가 동의의 의미로 국기를 들어 장관이 펼쳐지기도 했다. 워낙 다들 활발하게 참여하다 보니 일주일 동안 읽은 메일의 수만 하더라도 150개가 넘었다.
또 다른 점은 수많은 의사결정이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민주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충분한 토론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안건은 그게 설령 1년 동안 연합을 이끌 임원진 선거라고 해도 가차 없이 폐기하자는 의사진행 발언을 한다. 또한 독자적인 기구인 의결신임위원회와 자문위원회는 총회 내내 모든 사항이 연합이 추구하는 가치와 헌법, 그리고 회칙에 따라 이뤄지는지 감독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세계의대생협회연합은 국제사회에서 인정받는 비정부기구가 될 수 있었고 가장 큰 청년 정치 참여 기구로 자리 잡았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청년 참여를 존중하는 국제사회의 분위기와 이를 뒷받침하는 각 나라의 정부 및 교육 기관, 그리고 이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한 많은 청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모든 이들의 건강을 위해 의대생들은 나름의 책임감을 지니고 오랜 기간 동안 노력해왔다.
반면, 이곳 한국의 의대생들은 우리나라 보건 정책은 물론 학교 내의 의사결정에서조차 존중받지 못하고 소외당하고 있다. 학생도, 의사도 아닌 애매한 위치에서 앵무새처럼 선배들이 하는 말과 생각들을 따라 하도록 종용받고 이를 벗어나면 가차 없이 낙오자로 낙인찍힌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학생은 좌절을 경험하고 상처받는다. 총회 내내 가슴이 뛰었던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생채기로 가득한 내가, 사는 이곳의 너머를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의대생들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대답하기 어렵지만 분명 어디에선가 노력과 책임감은 자리를 넓혀가고 있을 것이다. 어려운 환경에도 불구하고 잠을 조금 더 줄여가며 노력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
삼삼오오 모여 시작하는 봉사활동부터 매일 쏟아지는 의료 관련 뉴스를 보며 내뱉는 한숨까지 모두가 그들이 조금씩 나아가는 방식이다. 그렇게 한국의 의대생들은 지금 이곳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총회가 자리한 포르토즈 앞 투명한 아드리아해를 함께 산책하며 파견단 중 한 친구가 재밌는 사실을 알려줬다. 거대한 해류는 계산할 수 있어도 자갈 사이로 스미는 작은 물결들은 어떤 방향으로 들이칠지 현대 기술로도 계산할 수 없다고 했다. 만오천 명이 만드는, 누구도 알 수 없는 작은 물결들이 큰 해류가 되어 어느 순간 포르토즈 앞바다에 닿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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