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공의가 사직하고 병원을 뛰쳐 나간 뒤 한 달이 지났지만 복귀 움직임이 미미하면서 사태가 길어지고 있다.
정부는 업무개시명령과 진료유지명령 등 온갖 행정명령을 총동원해 전공의 복귀를 호소하고 있지만, 이들은 2000명 의대 증원 정책을 재논의하기 전까지는 돌아가지 않는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전공의에 이어 의대생까지 집단행동에 가세하며 정부와 의료계 '강대강' 대치가 끝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전공의 집단사직 장기화가 불러온 의료계 현 상황에 대해 알아봤다.
■ '면허정지·고발' 박차 가하는 정부…'면허취소' 이어질까?
정부가 마지막으로 전공의 집단 사직 관련 현황을 발표한 지난 8일 11시 기준, 100개 수련병원 전공의 1만2912명 중 계약 포기 또는 근무지를 이탈한 전공의는 1만1994명으로 92.9% 수준이었다.
반면 현장으로 돌아오는 전공의는 지난 1일 기준 전체 전공의의 6%에 불과해 매우 미미한 상황.
서울아산병원 관계자는 "구체적으로 병원을 떠난 전공의 숫자를 공개하긴 어렵지만 규모가 상당하고 현재까지 복귀 움직임은 없다"고 설명했다.
또다른 빅5병원 교육수련부 관계자는 "집단 사직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곧 다시 돌아온다는 생각에 짐을 두고 간 전공의들이 있었는데 최근에는 짐까지 모두 챙겨 나갔다"며 "돌아올 생각이 없다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이어 "전공의 수백명이 병원을 떠났는데 복귀율은 너무나 저조하다"며 "정부가 지난 4일을 마지노선으로 얘기해 (복귀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는데 지금은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고 덧붙였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5일부터 수련병원 100곳에 대한 현장점검을 실시, 업무개시명령 위반이 확인된 전공의를 대상으로 등기우편을 통해 면허정지 행정처분 사전통지서를 보냈다.
또한 현장을 이탈한 전공의 1308명에게 즉시 복귀하라는 업무개시명령을 공시 송달하고, 복지부 홈페이지에 대상자 목록과 함께 게시했다.
이는 업무개시명령 송달 효력을 확실히 해 면허정지와 고발 등 행정, 사법 처리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다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같은 정부의 대응 방침은 사실상 전공의 무더기 '면허취소' 사례까지 이어질 우려가 크다.
지난해 11월 시행된 의료법 개정안에 따르면, 전공의가 집단행동으로 '금고 이상의 형'만 받아도 면허는 취소되기 때문에, 정부가 본격 수사에 착수하면 수많은 전공의가 면허를 잃을 위기에 놓일 수 있다.
복지부는 최근 대한의사협회 비상대책위원회 간부인 김택우 의협 비대위원장과 박명하 조직강화위원장 등에게 3개월 면허정지 처분을 내렸다. 다만 아직 전공의를 대상으로 한 면허정지 사례는 없다.
복지부 관계자는 "면허정지 처분 3개월이 내려진 후 기간이 만료돼도 전공의들은 병원으로 복귀해 수련을 마쳐야 한다"며 "전공의 신분이 유지되는 기간 동안은 다른 의료기관에 취업하거나 개업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의료법 및 형법 위반에 따라 처벌하고 면허 취소 등까지 이어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 "병원 안 가요"…해외취업·알바 등 준비하는 전공의
'영상의학과 2년차 사직 전공의입니다', '사직 정형외과 전공의 구직 부탁드립니다'
병원으로 돌아올 생각이 없는 전공의들은 새 일자리를 구하려는 움직임이 관찰된다.
서울시의사회가 지난 3월 초 사직한 전공의들의 재취업을 돕겠다며 개설한 구인구직 게시판에는 약 300건의 구직 등록글이 게재됐다.
의사·의대생 온라인 커뮤니티 '메디스태프'와 직장인 커뮤니티 '블라인드' 등에도 자신을 사직한 전공의라고 밝히며 구직을 희망하거나, 이미 다른 곳에 취직해 곧 출근을 앞두고 있다는 등의 글이 올라오고 있다.
정부는 사직서가 수리 되기 전 전공의가 재취업할 경우 의료법상 겸직 금지 원칙을 어겨 해당 전공의뿐 아니라 이들을 채용한 개원의 등도 처벌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밝혔지만, 생계가 급한 전공의들은 '아르바이트' 전선에 뛰어드는 모습이다.
지방 대학병원에서 수련 중 사직한 전공의 A씨는 "지난달까지는 잠시 쉬고 병원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이 많았지만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주변에서 구직을 위해 사직서 수리 방법을 연구하는 전공의가 많아지고 있다"며 "특히 가정이 있는 전공의들은 알바나 과외 등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어 "병원을 떠난 후 불안하고 마음이 불편하지만 면허가 정지돼도 돌아갈 생각은 없다"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고민해보려 한다"고 덧붙였다.
국내를 벗어나 미국이나 일본 등 해외로 눈을 돌리는 전공의도 늘었다.
더불어민주당 신현영 의원(보건복지위원회)이 최근 의대생, 인턴 등 젊은 의사 1733명을 대상으로 의대정원 증원 정책 관련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해외에서 의사활동을 하겠다는 응답자가 급증했다.
의대증원 정책 발표 이전 '한국에서 의사로서 임상활동을 할 예정이다'라고 답한 응답자는 전체 1733명 중 1686 명이었으나, 정책 발표 이후에는 400명에 불과했다.
전공의들이 업무 중단을 예고한 당일에는 미국 의사고시를 준비하는 이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가 트래픽 초과로 접속이 차단되는 사태까지 발생한 바 있다.
전공의 A씨는 "유학 경험이 있는 저연차 전공의들 사이에 해외 의사 면허 취득에 대한 관심이 높다"며 "특히 정부가 각종 행정명령을 남발할 뿐 아니라 사직서를 제출한 전공의들이 다른 곳에서 근무할 수 없도록 재취업까지 모두 막아버리니 이에 질려 해외 취업을 고려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 '제자 잃은 교수'…정체성 흔들리는 '대학병원'
전공의들이 떠나가며 역할을 잃은 대학병원 교수들은 현 사태가 장기화되면 대학병원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여의도성모병원 김성근 교수는 "가르칠 학생이 없는데 어떻게 대학병원이라고 할 수 있겠냐"며 "교수들이 정부에 가장 크게 실망한 점 중 하나가 교수로 역할을 지킬 수 없게 해 자부심과 자존심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열심히 진료보고 당직서며 끝까지 환자 곁을 지켰는데 이러한 실망감에 오히려 병원에 못 있겠다고 얘기하는 교수들이 많다"며 "떠날 준비를 하는 교수들이 여기저기서 보인다"고 덧붙였다.
빅5병원 필수의료과 교수 또한 "병원에서 전공의 90%가 빠져 온갖 병원이 비상경영체제를 선언하며 전시상황과 같은 위기를 겪고 있는데 의료공백이 없다는 정부 입장에 허탈감이 크다"며 "많은 교수들이 수련병원에서 수련이 중단된 점에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어 문제가 크다"고 토로했다.
이어 그는 "더욱 심각한 문제는 이번 사태가 종결된 후 필수의료과 지원율이 더욱 악화되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정부는 생명을 두고 협상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누가 그러한 행동을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정부는 교수들을 향해 전공의가 병원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정부와 함께 설득해달라고 촉구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은 실정이다.
오는 25일부터는 빅5(서울대·세브란스·서울아산·삼성서울·서울성모) 병원 의대 교수들이 개별 사직에 뜻을 모으며,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
김성근 교수는 "전공의가 돌아올 명분을 만들어주고 교수들이 대화로 설득하라고 얘기해야 하는데 면허정지, 취소 등을 언급하며 설득하라는 것은 대화를 명목으로 칼을 들고 덤비는 것과 다름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우리 병원 역시 모든 전공의가 떠나고 한 명도 돌아오지 않았다"며 "의대 증원 중재와 전공의 복귀를 위해 노력하고 싶은데 사실 무력감이 크다. 교수에게 전공의를 설득할 수 있는 빌미를 마련해달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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