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겨울을 지내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는 순간이 썩 즐겁지 않았다. 눈이 소복이 쌓인 외상센터를 뒤로한 채 자취방으로 돌아온 나를 기다리는 건, 파국(波局)이었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새로운 세상에 던져졌다. 사람들이 남긴 댓글은 비수가 되어 날아왔고, 학생들은 이기심이라는 프레임 속에 갇혀 짓눌렸다.
분명 가운을 입고 실습하고 있었을 노릇인데, 거리를 걸으면서도 알 수 없는 감정에 주눅 드는 상황. 현실감이 없었다. 친구들과 동생들은 매일 불안에 떨며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그저 어두운 터널을 걸어가는 마음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책임지고 싶었다. 2020년을 겪었던 사람으로서, 본과 4학년 선배로서, 공동체에 많은 애정을 쏟았던 사람으로서, 마땅한 도리를 다하고 싶었다. 소중한 사람들이 상처받는 상황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비상시국 대책위원회(이하 비시대위)가 설립되었다는 소식에 곧바로 지원했다. 능력이 허락하는 한에서 최선을 다했다.
팀원으로, 팀장으로, 본부장으로, 직급이 한 단계씩 높아졌다. 체계를 개편했다. 더 많은 이들에게 진실을 알릴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다른 의과대학 비시대위들을 찾아 나섰다. 함께 나아가자고 외쳤고, 서로를 신뢰하고 의지하자고 말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살아내던 중, 어느새 옷장에서 반소매를 꺼내입는 날씨가 찾아왔다.
사태 이후 몇 달간,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쉬지 않고 노력했다. 많은 아이디어를 제시했지만, 모두 실현되지 못한 채 좌절되었다. 현실은 잔혹했다. 한낱 학생들의 마음만으로 변화의 물결을 일으키기엔 벽은 너무나 크고 단단했다. 20대 청년들의 무력감과 고통은 한낱 어리광으로 치부됐다.
이 복잡하고도 심오한 문제를 푸는 과정에 조금이나마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청년은 아마 의대협과 대전협의 임원진들, 그중에서도 지금 상황에 자신을 온전히 내던질 수 있는 사람들 정도에 불과했다. 많은 이들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하기보단 자신의 안위를 챙기기에 급급했다. 우리에게 그들을 손가락질할 자격은 없었다.
많은 의대생에게 그렇듯, 나에게도 무력감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노력만으로는 변화시킬 수 없는 무언가를 처음 마주한 이후로, 몸에서 의지가 눈 깜짝할 새에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버거워 천장을 마냥 바라보는, 그런 아침들이 늘어갔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서울의 여러 공원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의 행복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웃음소리와 함께 천천히 늘어지는 강물을 들여다보면, 잠시나마 마음의 물결이 가라앉는 듯했다.
우연한 기회로 이주영 의원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워낙 열심히 활동하시기도 하고, 말을 참 잘하신다는 소문에 홀린 듯 찾아갔다. 무언가 통찰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와 함께 좌석에 앉았다. 놀랍게도, 그녀는 청중에게 "당장 유튜브 알고리즘에서 박민수와 이주영의 이름이 절대 나오지 않도록 삶에서 지워버려라"고 말했다.
더욱 관심을 가지고 거리로 나오라고 할 줄 알았는데, 정반대의 이야기를 들으며 눈동자가 흔들렸다. 일단 여러분이 살아야 한다, 그래야 뒤를 생각할 수 있다는 그녀의 이야기, 백 번이고 맞는 말이었다. 언제까지고 무력감과 분노라는 핑계 뒤에 숨어 올해를 보낼 수는 없었다. 큰 울림을 느꼈다.
이날의 충격은 2월부터 7월까지의 경험과 맞닿아, 하나의 방향을 이루었다. 덕분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뉴노멀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 따위의 고민에 대한 답 또한 명쾌히 내릴 수 있었다. 지금부터는 내가 내린 답에 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참 가슴 아픈 말이지만, 답답함이라는 감정에 매몰될 시기는 이미 지나버렸다. 우리가 아파하는 와중에도 법안들은 턱턱 통과되었고, 화를 잔뜩 내며 뉴스를 보더라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이제 우리에겐 두 가지 삶이 남았다.
하나는 현 사태와 관련된 모든 뉴스, 커뮤니티, 기사를 끊어버리고 여행도 다니면서 지금껏 하고 싶었던 많은 것들을 즐기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어떻게든 찾아 발악하는 삶이다.
나는 원래 성정이 그러하듯 후자를 골랐지만, 무력함에 잠식될 바에 차라리 추억을 쌓고 행복을 위해 시간을 쓰는 것이 낫다는 말에는 백번 동의한다.
뉴노멀은 필연적이다. 의정 갈등이 어떤 결과로 이어지더라도, 우리 모두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정부, 국민, 의사 그 어떤 집단도 승리할 수 없는 상황이 왔고, 의정 갈등은 누가 덜 쓰라린 상처를 안고 돌아가냐의 싸움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휴학 승인조차 그렇다. 승인된다면 물론 학생들의 안전은 보장되겠지만, 전공의의 복귀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지옥이 기다리는 것은 매한가지이다. 결국 휴학 승인, 원점 재논의, 그런 것들보다 더 먼 곳을 바라봐야 한다.
'필수의료패키지'에 화를 내기보단 그 결과물이 왜 등장했는지에 대한 맥락을 알아보고, 언론의 악마화에 질색하기보단 거부감 없이 착착 진행되는 이유가 무엇일지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어떻게 하면 시민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 의사들은 사회의 엘리트로서 무엇을 제시할 수 있을지, 이제 우리는 의대를 다니며 좀처럼 고민하지 않았던 것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의대 공동체 내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어떤 이는 공부에 몰두하며, 다른 이는 연구에 몰두하며, 또 누구는 동아리에 몰두하며 저만의 생활을 한다.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성숙해지는 것은 사실이나, 비슷한 사람들과만 교류하는 삶에 지나치게 익숙해진다.
나와 아예 다른 삶의 궤적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법은 배우지 못한다. 이런 환경에서의 경험이 계속해서 누적되면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도, 다른 이를 이해하는 것도 어렵다.
기존의 사고방식을 잠시 내려놓자. 예전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같은 방법으로 생각하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시민들은 의료 현실을 알지 못한다, 의사들이 돈 많이 버는 게 배 아파서 돌을 던지는 거다.'. 흔히 보이는 이런 문장들, 이들은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담론의 연장선을 그리지 말고 본질에 다가가자.
고민하는 것은 어렵다. 앞서 던졌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더욱 어렵다. 어떻게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나는 우리와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만나는 것이 그 열쇠라고 생각한다. 의대 내에서도 사람들의 삶은 제각각이지만, 다양한 진로를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의 삶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고 매력적이다.
삶의 한순간에서 그들의 궤적과 당신의 궤적이 맞닿고, 전혀 알지 못했던 세상을 눈으로 바라보는 장면을 떠올리자. 약간의 기대와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는가? 발을 내디뎌 그 궤적들을 마주할 때 비로소 나를 알게 되고, 고민에 대한 답을 얻게 된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자부심과 안정감을 주었던 의대 공동체에서 잠시 벗어나자.
봉사, 동아리, 대외 활동, 운동, 어떤 것이라도 좋다. 정 여의찮다면, 의대 내에서라도 내가 하지 않았던 것들을 도전해 보자. 새로운 환경에서 추억을 쌓으며 고민과 질문들을 이어 나가면 어느샌가 유의미한 지점에 닿는다.
비틀어 바라보자. 골몰하고 도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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