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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와 예술, 그리고 재탄생의 이야기

고상백 교수
발행날짜: 2024-12-09 11:00:16

[연재 칼럼]고상백 교수의 의학과 미술

1986년, 화가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이 완성한 작품 무제 3 (Untitled III)은 형태와 색상의 얽힘이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조화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노랑, 빨강, 파랑이 어우러지고, 흰 배경 위에 선과 형태는 춤을 추듯 움직인다. 노란색의 음영은 깊이를 더해준다. 이미지는 캔버스 전체를 가로질러 움직이는 듯하다. 빨간 선들은 흰색 배경에서 튀어나와 소용돌이치고, 일부는 다른 선과 얽히며, 다른 일부는 금세 사라져버린다. 하지만 이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은 어딘가 모호하다.

그림의 실루엣은 팔다리나 탯줄처럼 보이기도 하고, 추상적 리본이나 풍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더 놀라운 점은 이 그림이 알츠하이머병 초기 증상을 겪던 시기에 그려졌다는 사실이다.

그림. 윌렘 드 쿠닝. 무제 3. 1986Willem de Kooning. Untitled III. 1986

드 쿠닝은 20세기 추상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며, 그의 예술은 현실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들었다. 그러나 70대 초반, 그는 기억 상실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이름을 잊고, 대화 중 침묵하거나 농담으로 혼란을 감췄다.

그의 기억 상실은 주로 새로운 정보를 저장하지 못하는 전향성 기억 상실로 나타났다. 하지만 그는 젊은 시절 로테르담에서의 훈련, 뉴욕에서의 예술적 고군분투 등 오래된 기억은 비교적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드 쿠닝의 예술은 구체적 형태에서 추상으로 진화했다. 초기에는 초상화와 광고 삽화처럼 구체적인 형태를 그렸으나, 1950년대에는 거친 붓질과 변형된 인체를 탐구하며 작품 여성1을 비롯해 독창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

그의 작업은 두꺼운 물감 층, 과감한 색상, 그리고 형태의 해체를 통해 순수한 감정을 담아냈다. 이는 전쟁, 홀로코스트, 핵 위협 같은 시대적 공포 속에서 현대인의 불안을 표현한 예술이었다. 드 쿠닝의 추상 예술은 단순한 비구상적 실험이 아니라 인간 감정과 경험의 깊이를 탐구하는 과정이었다. 그는 선과 색상, 형태를 조합하며 새로운 미적 가치를 창조했다. 그의 추상화는 특정 형태를 벗어나 관객에게 자유로운 해석의 즐거움을 선사했다.

1970년대 심각한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으로 작업을 멈췄던 드 쿠닝은 1981년, 아내 일레인의 도움으로 술을 끊고 건강을 회복하며 다시 붓을 들었다. 그는 과거의 작품을 참고하거나 이미지를 캔버스에 투사하여 재현하며 창작을 이어갔다. 놀랍게도, 그는 1981년부터 1986년까지 254점을 제작했다. 이전에 수년씩 걸리던 작업이 몇 주 만에 완성되었고, 작품들은 밝고 대담하며 유려한 형태로 새로운 활기를 띠었다. 드 쿠닝의 작업 과정은 그의 인지적 장애에도 불구하고 고도로 정교했다. 그의 그림은 단순히 본능적 움직임의 결과물이 아니라, 색상과 선, 형태의 조화를 추구한 지적 결정의 창작물이었다.

그림. 윌렘 드 쿠닝. 여인1. 1952Willem de Kooning. Women I. 1952

드 쿠닝의 예술은 단순히 그의 기억과 인지 능력을 보존하는 도구가 아니었다. 그의 작품들은 인간의 창의성이 질병 속에서도 어떻게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예술이 단순한 표현 이상의 치유적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특히 치매와 같은 신경학적 질환 속에서도 그의 창작은 색과 형태를 통해 감각을 자극하고 자아를 유지하도록 도왔다. 그는 "나는 살기 위해 그림을 그린다"고 말했다. 그의 말처럼, 예술은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었다.

드 쿠닝의 후기 작품을 두고 그 질이 초기 작품보다 떨어진다고 평가하기에는 신중해야 한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오히려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을 극복하고 회복된 정신적, 신체적 상태에서 이루어진 독창적인 시도들이었다.

우리는 드 쿠닝의 예술이 그의 창의성, 기억, 감각, 그리고 인간 정신의 잠재력에 대해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깊이 숙고할 필요가 있다. 예술은 치매를 겪는 이들에게 단순한 치료 도구를 넘어,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표현하는 데 핵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

드 쿠닝의 사례는 치매 치료에서 인간중심치료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인간중심치료는 환자를 질병의 집합체로만 보지 않고, 그들의 삶과 감정, 창의성을 포함한 전인적 존재로 바라보는 접근법이다. 드 쿠닝의 사례는 단순히 알츠하이머병의 증상을 억제하는 데 그치지 않고, 환자의 남아 있는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며 그들의 자아를 존중하고 격려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드 쿠닝의 작품들이 보여주는 생명력은, 감각적이고 창의적인 활동이 환자에게 심리적 안도와 치유를 제공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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