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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을 조장하는 사회

하지현
발행날짜: 2003-07-06 19:51:37

하지현<정신과 전문의.의학박사>

‘Double-bind message'…정체성의 혼란

아이에게 친구에게 과자를 아낌없이 나눠주라고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너만 먹으라고 애써 사준 과자를 벌써 다 없앴냐면서 혼을 내면 아이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아이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할지 몰라 허둥대가 결론을 못내리고 자아의 붕괴를 경험한다.

그레고리 베이트슨과 도날드 잭슨이 정신분열병의 원인을 사회심리학적으로 설명하며 가족내에 위와 같이 부모가 아이에게 행동, 태도, 감정에 대해 일관되지 않은 메시지를 주면 아이는 결국 자기만의 세계로 도망가 버려 그 때문에 정신분열증을 앓게 된다며 이를 ‘Double-bind message'라고 하였다. 지금이야 정신분열증은 생물학적인 모델로 설명을 하고 더블 바인드 메시지로 병인론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하지만 지금도 그와 같은 방식의 메시지전달은 혼란을 야기한다는 면에서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이 개념이 요즘 의료계의 상황을 설명할 때 요긴한 것 같다. 한 쪽에서는 소신진료와 의학지식내에서 가장 최신의 최적의 진료를 하기를 원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과잉처방, 과잉검사를 하는 악덕의사로 몰아세운다. 그러니 어느 장단에 맞춰야할지 몰라 어리둥절해있다 보면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일진광풍의 두 장단에 미친년 널뛰듯 이리뛰고 저리뛰다 정신을 차려보면 수중에 든 것은 하나 없고, 속곳만 입은 채, 굶주린 배만 움켜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온전히 제 정신이 박혀있던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쪽에서는 클래식이 다른 한쪽에는 락 음악이 쿵쾅거리는 곳에 두 시간만 있으면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또 고부간의 갈등이 있는 집안에서 어머니와 아내의 서로의 입장을 듣다보면 나중엔 그저 도망가 버리고만 싶은 기분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닐 것이다.

물론 세상에서 어느 한쪽만 무조건 따르며 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만 그러기 힘든 게 사회의 룰이다. 그렇지만 너무나 다른 두 가지 요구조건이 결정권을 가진 쪽에서 오거나, 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념체계와 판이하게 다른 요구사항이 들어오면 선택의 문제가 생존의 문제, 삶의 질의 문제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 짓누르는 형국이 되면 그 갈등은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게 된다.

그게 한 개인의 결정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특정집단에게 전가되며 사회적 ‘희생양 만들기’를 통해 나머지 이해집단들이 전체 사회의 문제점을 봉합하려는 양상이 된다면 그 집단의 혼란은 더욱 가중될 것이다.

이런 식의 더블바인드 메시지가 한 개인에게 반복적으로 가해지면 그 사람은 차후에 정신분열병에 걸릴 소지가 많다는 예전의 이론은 요즘 들어 사회의 집단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설명할 때 많이 쓰이고 있다. 이런 더블바인드 메시지로 개인은 정신세계의 붕괴와 함께 나와 남사이의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정신증상을 경험하게 된다면 그런 메시지에 노출된 집단은 어떨까?

아마 먼저 크게 보면 집단 전체의 정체성의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집단내의 구성원이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고 또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가 될 것이며, 집단외부에서 그 집단을 평가할 때에도 모호하고 정체를 알 수 없다고 보게 된다. 뭔지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한 존재가 있을 때 인간은 두려움을 느껴 피하거나 파괴하려는 것이 인간본성의 하나다.

그래서 사회전체에서 의료계는 전체 사회와 동떨어져있는 이질적 집단으로 받아들여질 뿐만 아니라 그 이질성이 우호적인 것이 아니라 모호함과 불확실성으로 채워져 있기에 회피하거나 적대적인 자세를 취하며 바라보게 된다. 의료계가 국민보건전체를 생각하며 보편 타당한 의견을 아무리 제시한다고 하더라도 단단한 콘크리트 벽에 못을 박듯이 튕겨져 나가기만 하는 것이 바로 이런 사회전체가 의료계를 바라보는 눈 때문이다.

다음은 집단내부로 보자. 이렇게 동시에 두 가지이상의 상반된 기준이 집단에 제시되고 반응을 해야 한다면 내부는 혼란에 빠지고 각각의 소집단의 이해관계의 차이에 따라, 또 각각의 구성원의 사회 문화적 배경, 가치관에 따라 기준을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집단 내에서 통합된 하나의 가치관이 만들어지지 못하고 내부갈등과 분열이 야기될 수 밖에 없다.

지금 의료계가 바로 이런 형국이다. 분열이 조장되는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각개약진을 해서 나 하나라도 살아남아야 하는 걸까? 호랑이에게 물려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두 눈 부릅뜨고 견디고 있으면 될까?

이럴 때 가장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외부에서 더블바인드 메시지가 어떻게 들어오건 간에 집단내부의 통일된 가치체계의 기준을 만들고 그 기준 안에서 일관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조직내부의 동요도 줄어들 수 있다. 자극의 강도와 종류에 따라 일관된 반응을 보이는 것을 통해 내부의 구성원들 또한 각자의 반응수준을 결정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전체조직의 엔트로피가 낮아지며 안정화되면서 좀더 멀리 바라볼 여유를 갖게 된다. 또 그것이 선행 되야 그동안 잊고 있던 내부의 산적한 여러 문제를 차근차근 자기반성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외부에서 의료계를 바라보는 존재감이나 정체성도 점차 뚜렷하고 명확해질 수 있다. 어떤 대상이 좋은지 싫은지 보다 더 위험한 것은 무엇인지 모를때이다. 어떤 존재인지 명확해지면 필요이상의 공격성의 대상으로 노출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좋으나 싫으나 의료계를 대표해 외부환경과 교류를 하는 것은 의사협회다. 이 의사협회가 일단 외부의 이런 다종다양한 자극에 대해 어찌됐던 일관된 반응과 기준을 제시하며 칼리브레이션을 해나갈때까지 지켜보며 응원을 하는 것이 분열을 조장하는 이 사회에서 의료계가 내적 붕괴의 상황에 빠지지 않고 정체성을 굳건히 지켜나갈 길이다.

하지현<정신과 전문의.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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