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팬데믹, 초고령화 사회 진입 등 우리나라의 의사 과학자 양성 필요성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의과학 분야 지원자가 연간 의대 졸업생의 1.6%에 그치는 등 의사 과학자 불모지로 통한다.
이에 정부는 올해부터 '글로벌 의사 과학자 양성 사업'을 시행하는 등 대책 마련에 나섰다. 하지만 관련 정책이 의과대학 정원 증원과 결부되는 등 실효성에 의문이 뒤따르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의사 과학자 선배들은 질병 치료, 신약·의료기기 개발 등 여러 분야에 진출해 길을 개척하는 중이다. 이들은 어떤 비전으로 임상에서 떠나 과학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일까? 11일 메디칼타임즈는 이노크라스 고준영 희귀질환 디렉터를 만나봤다.
이노크라스는 전장 유전체 분석을 통해 건강·질병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기업이다. 암, 희귀 질환에 대한 전문성을 바탕으로 전장 유전체 진단 플랫폼을 구축해 개인별 유전적 구성에 대한 포괄적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여기서 희귀질환 디렉터는 전장 유전체, 멀티오믹스 분석 등을 통해 희귀 질환을 진단하고, 나아가 일반 인구 집단에서의 유전체 활용 방안을 연구하는 역할을 한다.
■병원에서 연구실로 "연구와 논문 작성이 재미로 다가와"
고 디렉터는 의사 과학자이기 이전에 소아청소년과 전문의이기도 하다. 그는 여러 전공 중에서도 소아과를 택하고 이후 의과학 분야로 진출한 이유에 대해 양쪽 모두 특별한 계기는 없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좋아 소아과를 선택했고, 우연한 계기로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에 진학했다가 의사 과학자의 매력에 빠지게 됐다는 설명이다.
고 디렉터는 "그저 아이들을 좋아하는 마음에서 소아과를 선택했다. 아픈 아이들을 보는 것이 심적으로 힘들기도 했지만, 마지막 순간까지 아이들을 최선을 다해 돕는 것이 매우 큰 보람이었다"며 "병원이 삶이 되어버린 환자들에게 병원에서의 시간이 인내가 아니라 조금 더 즐거운 기억으로 남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당장은 임상 현장을 떠나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돌아가고 싶은 욕심이 있다. 다만 최근에 의정 갈등이나 필수의료 붕괴 등 소아과가 어렵다는 얘기가 들려오고 있어 다른 선생님들에게 일종의 부채 의식이 있다"며 "가식적일 수 있지만, 이 자리를 빌어 일선에서 아이들을 위해서 힘써주시는 선생님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진학은 평소 존경하고 따르던 교수의 추천이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큰 사명 의식이 있던 것도 아니어서 박사 과정 초반 1~2년이 무척 힘들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연구와 논문 작성이 마치 소설책을 읽고 상상하는 것 같은 재미로 다가왔고, 결국 졸업할 즈음엔 이 길을 더 가봐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게 됐다.
그는 "정말 모든 것들이 다 힘들고 고단한 시기였다. 애초에 쉬운 일은 없다지만 뚜렷한 목적의식 없이 박사 과정을 하려고 하니 굉장히 힘들었다"며 "나중엔 내가 왜 이러고 있나, 왜 여기 와서 사서 고생하고 있나 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하지만 카이스트를 졸업하면서 병원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길을 조금 더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이어 "의사 과학자가 되는 것에 주변의 만류도 있었고 스스로도 커다란 신념이나 거창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어서 조금 부끄럽기는 하다. 다만 그저 이런 일들이 즐거웠다"며 "남들이 많이 가지 않는 길이긴 하지만, 이 길의 끝을 계속 걸어가다 보면 어떤 풍경이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도 연구자의 길을 결심하게 된 이유가 됐다"고 전했다.
■"건강한 사람도 유전체 분석하는 정밀 의료 시대 열 것"
이렇게 그가 연구한 분야는 소아, 면역학, 유전체다. 코로나19 상황에서 병태 생리를 규명해 이 병이 왜 중증으로 가고, 각각의 환자들에게 어떤 치료를 적용해야 하는지 등을 연구했다.
그 결과 중증 코로나19 환자의 인터페론 신호 전달 경로 활성화가 주요 기전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확인했고, 병원과 협업해 실제 환자들에게 치료적 방침으로 적용하는 성과를 냈다. 이와 함께 인체의 면역학적 변화가 어떻게 이뤄지는지와, 만성 감염 및 면역 결핍 모델 등을 활용해 만성 염증이 유발하는 후성유전학적 변화를 밝혀냈다.
고 디렉터는 이노크라스에 입사한 이후에도 희귀 질환 환자들을 진단하는 방법을 발전시키기 위한 연구를 교육과정 내에서 기초 교육에 대한 노출과 참여 기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의과학에 관심이 있거나 재능이 있는 학생들을 발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의사 과학자가 된 이후의 커리어 패스도 문제인데, 현재로선 의사 과학자들이 안정적으로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전무한 수준이라는 우려다.
이와 관련 고 디렉터는 "의사 과학자가 학계에 머물며 연구에 매진하기엔 여러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있다. 산업계로의 진출 기회도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며 "의사 과학자들이 훌륭하게 성장한 이후에도 그 역량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인재들이 의과학 분야로 유입되고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정책적인 지원과 제도적 기반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같은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의대 교육과정부터 기초연구에 대한 이해와 참여를 높일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임상 중심의 기존 교육과정에서 이를 어떻게 기초과학과 연계할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비전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 이와 함께 의사 과학자들의 산업계 진출 기회를 넓히기 위한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는 제언이다.
■의사 과학자 양성 의대부터 챙겨야 "다양한 관점이 중요"
또 고 디렉터는 의사 과학자 양성의 긍정 사례로 카이스트 의과학대학원 과정을 조명했다. 단순히 의과학 분야에만 매몰되는 게 아니라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협업하며 시너지를 낼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 짜여 있다는 설명이다.
이와 관련 그는 "최근 학문의 깊이가 깊어지고 기술이 크게 발전하면서 혼자서 연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시대가 됐다. 특히 첨단을 달리는 분야에서의 연구는 더욱 그렇다"며 "이 때문에 다양한 관점을 가진 연구자들이 모여 의견을 모으고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환경이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서 이렇게 임상과학자들과 기초과학적 통찰력을 가진 학자들 간의 시너지가 발생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고 디렉터는 의사 과학자가 세간의 인식처럼 생경하고 특별한 직업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저 의사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과학을 하는 사람일 뿐이라는 설명이다. 다만 그는 아직까지 국내에서 의사 과학자로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아 그 용어를 정의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임상과 과학의 경계가 옅어져 의사 과학자가 쉽게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됐으면 한다는 것. 높은 진료 부담으로 의사가 임상과 연구를 병행하기 어려운 환경에 대한 제도적 개선이 이뤄진다면, 이들의 연구 기회가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다.
그는 "앞으로는 이런 임상과 과학의 경계선이 좀 더 옅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본인 역시 특별한 계기가 있던 게 아니라 작은 선택과 우연이 모여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며 "이처럼 의사 과학자가 굉장히 대단하고 생경한 일이 아니라 이렇게 쉬운 선택지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의사면서 과학자로서 사는 것이 분명히 쉽지는 않다. 하지만 이 길을 걸으며 매우 큰 보람과 가치를 느끼고 있다. 다른 이들도 이런 재미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라며 "그저 이런 선택에 있어 너무 겁먹거나 자신을 한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늘 도전하고 시도하면서 본인이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을 수 있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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