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시행까지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지만, 의료기관과 EMR 업체 참여율이 저조해 반쪽짜리가 될 전망이다. 이에 의료계 반대로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지지부진하다는 여론몰이가 이뤄지면서 반발이 나오는 가운데, 대한의사협회 의학정보원이 대안으로 제시되는 상황이다.
대한의사협회 실손의료보험대책위원회는 지난 2일 의협 기자단과 간담회를 열고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가 좌초될 위기에 놓였다고 전했다.
현 상태에선 EMR 업체 참여율을 높이는 것이 어려워 의료기관 역시 참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이유에서다.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은 자체 EMR을 구축할 여력이 있는 대형병원뿐이라는 것.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담은 보험업법 개정안 제1항 및 제2항에 따르면 여기 필요한 전산 시스템의 구축・운영에 관한 비용은 보험회사가 부담한다.
하지만 EMR 업체들이 보험금 청구 자료를 전송하는데 드는 수수료를 부담할 주체가 명확하지 않아, 사업이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EMR 업체들은 건당 100원의 수수료를 책정해야 한다는 입장인데, 연간 1억 건의 보험금 청구를 소화하려면 100억 원의 추가 부담이 생기는 것.
하지만 보험업계가 이를 부담하려는 의지를 보이지 않고, 이를 환자에게 청구하기도 어려워 사업이 공회전하고 있다는 게 의협 실손대책위의 진단이다. 이렇게 EMR 업체 참여가 어려워지면서, 이들의 EMR을 사용하는 의료기관 역시 자동으로 참여하지 못하게 된 상황이라는 것.
실제 금융위원회가 지난달 12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서비스 참여를 확정한 요양기관은 총 3774곳이다. 이는 오는 25일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 서비스 시행 대상인 병상 30개 이상 병원 4235곳, 보건소 3490곳 등 요양기관 총 7725곳의 48.9%에 불과하다. EMR 업체는 전체 54곳 중 19곳만 참여해 35.2%로 더 저조한 참여율을 보였다.
반면 민간 핀테크 업체 지앤넷에 따르면, 보험개발원 없이 실손보험 간편 청구를 진행할 수 있는 의료기관이 1만6099곳에 이르는 상황이다.
EMR 업체들의 불참은 보험업계가 전산 시스템 구축에 소극적이기 때문이지만, 정작 의료계 비협조로 사업 진행이 더디다는 여론몰이가 이뤄지고 있다는 게 실손대책위의 지적이다.
이와 관련 실손대책위 이태연 위원장은 "관련 법안에 따르면 보험회사가 전산 시스템을 구축하고 운영해야 한다고 명백히 명시돼 있다. 이 법안을 실행할 수 있게 만들 의무는 보험회사에서 있는 것"이라며 "중계기관 역시 보험업계가 원하는 보험개발원으로 선정됐지만, 제대로 된 투자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 이유로 자신들이 생각한 것과 다른 형태로 법이 시행돼 실익이 없다거나, 생각보다 더 큰 비용이 든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며 "그러나 의료기관이 참여하지 않아 사업이 지지부진하다고 호도되는 상황인데, 진짜 원인은 전산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한 보험업계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민간 핀테크 업체를 통해 이뤄지는 의원급 실손보험 간편 청구에 대한 규제가 이뤄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핀테크 업체들은 각기 다른 루트로 보험금을 청구하기 때문에, 정부 입장에선 이를 보험개발원으로 일원화하길 원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여기 사용되는 EMR 각기 다른데, 사업이 지지부진해지면서 핀테크 업체를 통한 간편 청구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이를 일원화하려고 할 수 있다는 것.
의협 실손대책위 역시 이 같은 우려가 실현될 가능성이 있다는 데 동의했다. 또 이는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를 통해 환자 정보를 집적하고,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보험업계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강력히 반발했다.
이와 관련 실손대책위 이봉근 간사는 "정부에선 일원화를 원할 수밖에 없다. 현재 핀테크 업체들은 보험회사별로 다른 루트로 자료를 보내고 있어 굉장히 복잡하다"며 "하지만 일원화 시 모든 보험회사는 표준화된 방법을 통해서 보험개발원으로부터 자료를 받기만 하면 된다. 더 큰 문제는 의협이나 개원가가 이를 막거나 반대할 만한 방법이 없다는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태연 위원장은 "이미 개원가는 핀테크 업체들을 통해 간편하게 보험금을 청구하고 있었고 개인정보보호법도 잘 준수되고 있다"며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의 목적은 환자의 편의다. 그런데도 핀테크 업체를 규제하거나 굳이 보험개발원을 통하도록 하는 것은 환자 편의를 역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의협 실손대책위는 정부가 보험개발원만 고집하지 말고, 기존 민간 핀테크 업체를 활용하는 개방적이고 점진적인 방안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보험개발원을 통한 대형병원 실손보험 청구 간소화와 개원가 간편 청구를 투트랙으로 운영해야 한다는 것.
현재 사업 추이를 볼 때 의원급뿐만 아니라 중소병원 역시 보험개발원을 통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이유에서다. 이미 자리 잡은 개원가 실손보험 간편 청구를 막는 것은 민간기업의 존립 근거와 기반을 박탈하는 꼴이 된다는 우려도 있었다.
환자 입장에서도 보험금 청구 관련 서류가 제대로 보험사에 전달되기만 한다면 아무런 불편이 없고, 오히려 다양한 서비스제공자가 상호 경쟁하면서 질이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다.
핀테크 기업 및 EMR 표준화 필요성과 관련해선 의협 실손대책위 역시 동의했다. 다만 환자 정보 집적 우려가 있는 보험개발원 대신, 의협 의학정보원을 통하는 방향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보험개발원에 환자 정보가 집적된다면, 보험사들이 실손보험 가입·갱신 신청자들의 진료 기록을 열람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미 보험사들이 질병코드로 실손보험 가입을 거절해왔던 것을 고려하면 관련 문제가 더욱 심각해질 수 있다는 우려다. 하지만 의학정보원이라면 이 같은 보험사들의 역선택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
이와 관련 실손대책위 박준일 위원은 "이 사업을 시행함에 있어 핀테크 업체와 EMR 업체 표준화도 굉장히 중요하다. 이를 의협 의학정보원을 통해 진행할 수 있도록 정부에 요구할 계획"이라며 "다만 정부가 이를 허용할지, 또 보험개발원처럼 의학정보원의 환자 정보 집적을 인정할지는 미지수여서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우리 대안은 환자 정보를 집적하더라도, 이 데이터로 보험 가입자가 역차별받거나 역선택 받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며 "의협 의학정보원을 환자 보호 역할을 수행하는 기구로 만들겠다는 목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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