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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치료하는 법

건국의대 3학년 김채연
발행날짜: 2025-03-24 05:00:00

건국대학교 의학전문대학원 본과 3학년 김채연(투비닥터 홍보팀)

3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진료를 이어온 라파엘클리닉의 일요일은 언제나 온갖 국적의 노동자들로 분주하다. 그러나 정신과 클리닉을 개시한 첫날, 정신과 선생님과 보조 봉사자였던 나는 한참이나 목을 빼고 환자를 기다려야 했다.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서, 혹은 정신과 진료라는 이름 자체가 생소하기에 정신과 클리닉을 찾는 환자가 드물었기 때문이다.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이어가던 몇 마디 화제도 떨어져 가던 참이었다. 이대로 환자 한 명도 보지 못한 채 첫 진료를 끝마치게 되는 걸까 하는 걱정이 들던 차에, 드디어 첫 환자가 왔다. 순박한 눈망울의 동양계 중년 남환이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몇 년째 밤에 잠들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정신과 진료와 다른 과와의 가장 큰 차이점 중의 하나는 문진의 상세함이다. 물론 개인차도 있겠지만, 정신과에서는 환자의 정신적 문제를 '다루기' 위해 직업이나 생활 습관과 같은 세세한 질문을 반드시 던져야만 한다. 불면증이라는 진단명을 입에 올리기 전 선생님은 환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부드럽게 물으셨다.

환자는 한국에 온 지 10년이 넘었고, 방글라데시에 아이들을 두고 왔다고 했다. 공장에서 일하며 교대근무를 하기에 밤낮이 바뀐 생활을 일주일에 절반가량하고 있었다. 원래 가지고 있던 불면 경향이 3년 전, 아내의 불륜으로 이혼을 겪은 이후로 심해졌다.

이런 식으로 인내심을 갖고 차분히 환자의 내력을 듣는 것이 정신과 치료에선 아주 중요하다. 증상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라포 형성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침대 하나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기숙사나 작은 원룸이 그들이 한국에서 잠을 청할 수 있는 공간의 전부다.

교대근무 때문에 밤에 일을 해야 하기에 잠을 쫓아내는 커피는 달고 살아야 한다. 대부분은 한국어나 영어가 그렇게 유창하지 않고 속을 털어놓을 가족도 멀리 있는 경우가 많으니 자기 이야기를 나누기 쉽지 않을 거라 짐작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놓은 환자는 진료가 끝난 이후 정신과 선생님에게 '당신은 정말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는군요!' 라며 기분 좋은 미소를 건넸다. 정신과 진료가 처음이라던 환자는 삼십 분이 넘는 진료 끝에 홀가분한 얼굴로 진료실을 나섰다. 선생님께 받은 수면 위생 교육과 미량의 수면제 처방전을 손에 쥔 채였다.

나는 라파엘 클리닉에서 3년 정도 꾸준히 봉사를 했지만, 이런 식으로 클리닉을 찾는 이주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밀접하게 들어본 것은 처음이었다. 환자 중심적 치료로 의학의 패러다임이 바뀌고는 있다지만 환자의 질병의 원인을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한정된 시간 안에 정보를 뽑아내야 하는 의사들이 환자 개개인을 온전히 알아가기란 여전히 쉽지 않은 것 같다. 특히 이주노동자와 같은 의료 소외계층은 라파엘클리닉으로 많이 몰리기 때문에 한 명 한 명을 다룰 시간이 길지 않아, 정신과에서 이렇게 그들을 알아갈 기회를 얻은 것은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사회의 '사각지대'에 있는 환자들에게 자기의 이야기를 꺼내 놓을 상대는 흔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그들에 대해 들을 기회가 없었더라면 나 역시 그런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고 평생을 흘려보냈을지도 모른다.

육체의 병도 마음의 병도 결국은 삶에서 비롯되는 것이니만큼 병을 제대로 마주하고 치료하기 위해서는 환자의 삶에 대한 이해가 필수이다. 그걸 위해서는 평소에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내 삶의 등장인물이 아닌 그들 자체로 온전히 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 저마다의 입체적인 고통이 있음을 이해하고, 기꺼이 그 고통을 수반하는 삶을 탐색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의사야말로 가장 본질적인 '삶'을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아닐까.

정신과 진료의 문턱이 많이 낮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이 정신과 약은 마약성 약물이라고, 정신과에는 '미친' 사람들만 간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정신과도 다른 과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사람을 치료하기 위한 곳이고, 다른 과에서 듣기 힘든 환자의 진솔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장소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더 많은 이주노동자가 이런 사실을 깨닫고 정신과의 문턱을 넘어 주었으면 좋겠다. 아주 유창한 대화를 할 수는 없을지라도, 언제나 그들의 말을 듣기 위한 선생님과 봉사자들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해당 사례는 실화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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