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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마주하며

연세의대 4학년 박태웅
발행날짜: 2025-02-24 05:30:00

연세대학교 의대 본과 4학년 박태웅
투비닥터 편집팀

외할아버지께서는 작년 4월에 소천하셨다. 나는 몇 달간 알 수 없는 괴로움에 시달렸다.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냐? 라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았다. 혼란스러웠다고 보는 것이 적절하겠다.

혼란의 시작은 겨울이었다. 처음으로 죽음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외상센터에 실려 온 환자의 죽음. 처음 마주했을 때, 그는 이미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다.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그저 교수님들이 시키는 대로 복부 초음파를 봤고, 배운 대로 열심히 CPR을 했다.

흉부를 압박할 때마다 귀에서 피가 주룩주룩 흘러나왔다. 그는 갈비뼈를 부술 듯이 눌러대는 기계를 낀 채 얼마간 더 버티더니, 30분 뒤에 사망선고를 받았다. 교통사고 현장을 도우려다 차에 치인 선한 사람이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당직실에 들어와 30분 동안 멍하니 천장을 보다 잠에 들었다. 다음날 일과가 끝나자마자 pc방에 들어가 막차가 끊길 때까지 게임을 했다. 기분이 썩 괜찮았다. 하루 만에 멘탈을 잡다니, 나 정도면 정말 건강하게 잘 이겨낸 거라고 다독였다. 그렇지, 필수과 가고 싶으면 이 정도는 무뎌야지 했다. 그렇게 죽음을 잘 이겨냈다 싶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지내던 이의 죽음은 그렇게 간단히 삼킬 수 없는 일이었나 보다. 계속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쓰러지셨을 때 좀 도와드렸다면 2차 병원에라도 갈 수 있지 않았을까? 대학병원 상황이 괜찮았다면 응급실에서 돌아가라고 했을까? 3차 병원에 입원했다면 절반의 확률이라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맨 앞에서 휴학하자고 투쟁하자고 외친 것에 대한 업보인가?

그럼에도 열심히 공부하라니, 외할아버지는 지금 상황을 알고 그러신 걸까? 그 질문들에 쉽사리 대답할 수 없었다. 마음의 괴로움은 덩달아 커졌다.

생각과 감정이 떠오르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것들은 시간이 갈수록 명확한 문장의 형태를 띠기보단, 그저 혼란함만 남긴 채 흩어졌다. 사라지기 전에 글에 담아야 했다. 무작정 한글 파일을 열고 타자를 쳤다. 문장이 이어지지 않았다. 생각의 파편만 한 줄씩 쌓일 뿐, 더 뿌옇게 헝클어지기만 했다. 며칠을 고민해도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아, 내 그릇에는 아직 담을 수 없는 글이구나 싶었다. 그 당시의 강렬함을 몇 달이 지나서야 상기하는 것은 어쩌면 애초에 불가능했던 것 같다. 한 문장만 남기고 글을 다 지웠다. '죽음을 목도하는 것은 얼마나 하찮고도 고통스러운 일인가.' 나는 그 이상의 무언가를 속에서 끌어내지 못했다. 괴로움을 느끼고 망각을 기다리는 것, 그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9월쯤 마무리될 일이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면 어떡하지? 없다는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차오를 정도로, 외할머니는 소중한 분이었다. 그분께서 돌아가실 때도 이렇게 단순히 괴로워하고, 망각하며 이겨낼 자신은 없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노인, 우리 외할머니. 평생을 교육자로 사시다 은퇴 후에도 복지관에서 다른 이들을 가르치고, 70세가 넘어서도 서예와 미술에 전념하시는 우리 외할머니. 유머로 외가의 분위기를 책임지시고 늘 따뜻하게 자식들을 맞아주시는 우리 외할머니. 그분이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건 나에겐 정말 어려웠다. 마냥 오래 사시길 빌고 싶었지만 이마저도 죽음을 유예할 뿐, 피할 수는 없었다.

이번엔 부재와 괴로움을 정면으로 마주해야 했다. 외할머니께 최선을 다하면 후의 괴로움이 덜 할까 싶었다. 여러 가지 것들이 떠올랐다. 함께 여행을 갈까, 자주 찾아뵐까, 이야기를 많이 나눌까. 하지만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나는 내가 최선을 다했고 외할머니께서도 행복하셨음을 증명해 줄, 실체를 지닌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때 외할머니는 타고난 이야기꾼이셨음이 떠올랐다. 명절에 내려가면, 사진첩을 뒤적거리며 그 시절에 담긴 추억들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듣게 만드는 그 입담. 우리는 종종 둘러앉아 그분의 위트에 깔깔거리며 무척이나 웃었다. 구술 생애사가 제격이었다.

이번 설에 인도네시아로 다 같이 가족여행을 가니까, 그 김에 인생 인터뷰를 신나게 해 버리는 것이지. 그리고 그걸 쫙 정리해서 가족들과 외할머니께 나눠드리면, 가족들은 그분을 언제든 추억할 수 있어서 좋고 외할머니는 인생을 쭉 돌아볼 수 있어서 좋고. 계획은 완벽했다.

그 이후는 척척 진행됐다. 작년 말에 동생과 외할머니댁에 놀러 가 당사자의 허락을 받았고, 함께 여행할 가족들의 동의도 모두 받아냈다. 인터뷰는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 시작되어 한 주에 걸쳐 진행됐다. 이제 남은 거라곤 180쪽 분량의 녹음본을 열심히 타임라인에 따라 뜯어고치는 일. 그 또한 외할아버지의 기일 전에는 마무리되지 않을까 싶다.

모든 과정은 즐거웠다. 외할머니의 입담은 여전하신지라, 인터뷰를 한번 시작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몇십 년이 눈앞에서 휘리릭 지나갔다. 처음으로 발령받은 초등학교에서 애들을 후딱 보내고 바다로 나가 헤엄쳤던 이야기, 고등학교 때 김치를 머리에 이고 몇 시간을 걸어 기숙사로 옮기던 이야기, 손자를 방학마다 업어 키우며 시장에 데리고 다녔던 이야기, 하나도 빠짐없이 정겹고 소중한 얘기들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는 100여 년 전의 이름 모를 누군가부터 외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나에게까지 이르렀다. 모든 인터뷰가 끝났을 때, 나와 외할머니는 서로 이어져 있다는 감각을 느꼈다. 무척이나 따뜻했다.

죽음이 두려웠다. 그것이 너무나도 이질적인지라, 나는 죽음을 마주하기는 커녕 목격하며 느낀 감정조차 단어로 풀어내지 못했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아직도 두렵다. 온전히 마주하지도 못한다. 외할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글을 쓰지 못한 것처럼, 외할머니의 경우는 글의 서두조차 쓰지 못할 테다. 하지만, 이제 죽음 앞에서 마냥 괴로움에 잠기진 않기로 마음먹었다.

과거를 기록하고 추억하며, 기쁨으로 이겨낼 수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 같이 웃으며 행복을 나누는 것, 그리고 이어져 있음을 느끼는 것, 나는 죽음을 그렇게 마주하고자 한다.
어서 글을 외할머니와 가족들에게 나누고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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