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과 1학년, 병리학 수업 시간이었다. 세포가 손상을 입더라도 일정 수준까지는 회복할 수 있지만, 특정 임계점을 넘어서면 다시는 원래 상태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교수님의 설명을 듣던 중이었다. 핵이 쪼개지고 세포막이 터져버리면, 아무리 좋은 처치를 해도 돌이킬 수 없다. 그 '돌아올 수 없는 지점'을 배우던 그 강의실의 건조한 공기 속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지나간 인연 하나를 떠올렸다.
그 시절의 나는 세포 하나를 지키는 법도 모를 만큼 철이 없었고, 나약했다. 내 나약함이나 부족함이 드러나는 것 그 자체를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바닥이 드러나려는 순간, 가장 쉬운 선택을 했다. 상대를 밀어내고 '나'라는 존재를 지키는 것. 하지만 그 '나'는 실은 위태로운 자의식에 불과했다. 인연을 스스로 끊어내는 것이 나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던 그때의 판단은, 지금 돌이켜보면 내 인생 가장 큰 오판이었다.
의학에는 환자를 살릴 수 있는 결정적인 시간, '골든타임'이 있다. 생명에만 골든타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에도, 관계에도 분명한 골든타임이 존재한다. 나는 그때 내 방어기제에 갇혀 그 결정적인 시간을 놓쳐버렸다.
"나는 아직 당신을 잘 모른다", "나는 아직 나조차도 잘 모르겠다"
관계를 망치고 난 뒤에야 깨닫는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내 사람'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나'라는 존재의 중요도를 잠시 뒤로 미룰 줄 아는 용기였다는 것을. 내 세계를 포기하고 상대의 세계에 종속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나의 세계와 너의 세계가 만나, 홀로 지켜내던 그 좁은 세계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우리'의 세계로 확장되어 가는 과정임을 그땐 알지 못했다.
한때는 나를 통과해가는 모든 인연을 붙잡고, 최대한 다양한 사람을 내 곁에 두는 것이 능력이라 믿었던 적도 있다. 넓은 인맥, 많은 친구, 내가 그들을 잇는 징검다리가 되는 삶. 그 시절의 경험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 덕분에 내 세계의 폭은 분명 넓어졌다. 하지만 의학 공부가 깊어질수록 얕은 지식만으로는 생명을 구할 수 없음을 깨닫듯, 인간관계 또한 '폭'보다는 '깊이'가 절실해지는 순간이 온다.
수많은 인연의 스침보다, 단 한 명의 '내 사람'과 나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봐야 하는 시점. 우리는 그 시점을 놓친 대가로 가끔 뼈아픈 후회를 치룬다.
최근 우연히 본 드라마의 대사가 폐부를 찔렀다. "저는 모든 만남과 이별이 운명에 따라 이루어진다고 믿습니다. 그 모든 사건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죠. 제가 세상을 구할 순 없겠지만 제 곁에 있는 사랑하는 이라도 지킬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구하는 거창한 의사가 되기 전에, 내 곁의 사람조차 지키지 못했던 지난날이 부끄러워지는 대목이었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 있어 줄 거라는 안일함. 그 안일함 속에서 뱉은 날 선 말들은 공기 중에 흩어지지 않고 관계를 얼룩지게 했다. 그리고 "아차" 싶어 바로잡으려 했을 땐, 이미 관계는 병리학 책에서 보았던 그 '비가역적' 변곡점을 지난 뒤였다.
이것이 타이밍이 가진 무서움이다. 한 번 흘러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죽어버린 세포가 되살아나지 않듯, 타이밍을 놓친 관계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뒤늦은 후회와 반성은 무의미할까? 병리학적으로 이미 죽은 조직은 되살릴 수 없지만, 의사는 그 과정을 복기하며 다음 환자를 살릴 지혜를 얻는다. 나에게 이토록 아픈 '반성'은 지나간 시간을 바로잡을 순 없어도, 다가올 미래의 선택을 바꿀 힘이 된다. 인간은 결국 관계로부터 성장하기에, 이러한 뉘우침은 '특정 시절'과 '특정 사람'만이 가르쳐줄 수 있는, 가장 값비싼 배움일 것이다.
어쩌면 그 시절의 미숙함과 그 사람과의 이별은, 비단 의사뿐만 아니라 앞으로 제대로 된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해 나에게 가장 값비싼 '임상 실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을 살리는 일도, 사람을 사랑하고 지키는 일도, 결국엔 그 결정적인 타이밍과 깊이, 그리고 인성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뼛속 깊이 가르쳐주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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