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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에서 배우는 한국 의료의 출구

서울시의사회 이정언 부회장
발행날짜: 2026-06-15 05:00:00

서울특별시의사회 이정언 부회장

서울특별시의사회 이정언 부회장

2024년 2월부터 시작된 의정사태는 그 동안 쌓인 대한민국 의료의 누적된 문제점을 단번에 드러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 국민이 가입된 의료보험, 암진단을 받으면 5년간 급여항목에서 단 5%만 본인부담이고 국가에서 95%를 보장해 준다고 자랑하던 대한민국 의료는, 실상 시장경제 체제 아래에서 강한 공적 가격통제와 민간 의료공급자 의존이 결합된 구조적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필수의료 인력 붕괴, 수도권과 비수도권 사이의 의료 불균형, 의료진에 대한 불신, 환자 권리 보장과 필수의료진 보호의 균형은 외면한 채 민형사 소송부터 제기하는 사회적 흐름은 젊은 의과대학생들과 수련을 받고 있는 의사들의 휴학과 사직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여과 없이 드러났다.

나는 한창 이 사태가 진행 중인 와중에 타이베이에서 개최된 학술대회에 두 차례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대만은 의료보험제도가 우리나라와 유사하고, 높은 보장율을 가지고 있으나 낮은 의료수가로 인한 의료진의 고강도 노동이라는 문제를 공유하는 나라다.

이런 까닭으로 대만 의사들은 대한민국의 의료 사태에 대하여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이 뜻밖에 궁금해하는 것은 '의대생 2000명 증원 선언'으로 비롯된 이 사태가 어쩌면 이렇게 오래 지속될 수 있느냐는 점이었다.

저수가 구조 개선, 필수의료진 보호, 의료사고를 처벌보다 의료시스템 개선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정책 마련 등에 대해서는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료계 내부에서 스승과 제자, 선후배 관계가 일시에 흔들리고, 젊은 의사들이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 자체를 위협받는다고 느꼈던 당시의 상황까지는 차마 충분히 설명하기 어려웠던 기억이 난다.

참고로 2024년 5월에 대만 총통으로 취임한 라이칭더(賴清德)는 내과를 전공한 의사 출신 정치인이며, 우리나라의 보건복지부장관에 해당하는 위생복리부 부장 스충량(石崇良)은 응급의학과 의사이자 공중보건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양국의 의료제도에 대해 조금만 더 알아보자. 한국과 대만의 의료보험제도는 동아시아에서 매우 유사한 사회보험형 보건의료 모델이다. 한국은 1977년 500인 이상 사업장 근로자를 대상으로 의료보험을 시작해 1989년 전 국민 의료보험을 달성했고, 2000년 국민건강보험공단 중심의 단일보험자 체계로 통합되었다.

대만은 한국보다 조금 늦은 1995년에 전민건강보험(NHI)을 도입했지만, 출범 당시부터 의무가입과 단일보험자 구조를 채택했다. 양국 모두 공적 보험자가 재정과 급여 기준을 강하게 관리하면서도, 실제 의료서비스 공급은 민간 의료기관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공통점이 있고, 법적 의무가입에 기반하여 매우 높은 인구 포괄률과 의료접근성을 달성했다.

또한, 행위별 수가제를 기본으로 하되 수가 수준과 급여 기준은 공적 보험자가 강하게 통제한다. 한국은 모든 요양기관이 국민건강보험 체계에 편입되는 당연지정제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대만은 법적으로는 계약제에 가깝지만 전민건강보험의 압도적 포괄성 때문에 대부분의 의료기관이 NHI 체계에 참여한다. 이로 인해 양국 의료계 모두 저수가, 원가보전, 심사·삭감, 의료의 자율성 문제를 오래된 갈등 의제로 공유하고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대만의 '총액예산제'이다. 대만은 2002년 전면적인 총액예산제를 시행하여 전체 의료비 증가를 사전에 설정된 예산 안에서 조절하고, 진료량이 늘어나면 점수당 가치가 변동되도록 설계했다. 반면 한국은 총액예산제 없이 행위별 수가와 심사평가 체계를 통해 의료비를 관리한다.

대만의 독창성은 공급자 중심의 의료정보 인프라이다. 대만은 2004년부터 도입한 전민건강보험 IC카드(NHI IC Card) 체제를 기반으로 파마클라우드(PharmaCloud), 메디클라우드(MediCloud), 마이헬스뱅크(My Health Bank) 등을 발전시켜, 보험자가 축적한 진료·처방·검사 관련 정보를 의료기관과 환자가 유기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왔다.

이는 환자가 병원에 카드를 넣으면 정부 서버와 실시간 연동되어 의료진이 환자의 서양의학 및 한의학 약물사용 기록, 검사결과, 수술기록, 치과치료이력, 알레르기 약물정보 등을 확인할 수 있고, CT나 MRI 등의 영상에도 접근할 수 있는 구조다.

단일보험자 체계가 단순한 재정 관리자를 넘어 의료정보 연결자이자 의료이용 조정자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매우 선진적이다. 이 시스템은 중복처방 방지, 약물 안전, 검사 중복 감소, 환자 본인의 건강정보 접근성 향상, 감염병 대응 등에서 큰 강점을 보인다.

이처럼 닮은 점과 배울 점이 많은 양국의 수도 의사회, 즉 서울특별시의사회와 타이베이시의사회는 2003년 자매결연 이후 정기적으로 교차 방문을 이어왔다. 굳건했던 모임이 2020년부터 2023년까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약 4년간 완전히 중단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방역이 완화된 이후 교류는 전격 재개되었다.

타이베이시의사회 홍더런(洪德仁) 회장과 집행부가 서울시의사회를 방문하였으며, 과거 2005년 당시 서울시의사회 의무이사로서 대만 방문을 수행했던 주역 중 한 명인 황규석 회장이 이끄는 현 서울시의사회 집행부가 타이베이시의사회 창립 80주년을 축하하며 타이베이를 공식 방문하여 더욱 끈끈한 유대를 보여주고 있다.

지난 2025년 6월, 서울에서 열린 정기 교류회에서 두 단체는 각각 주제발표를 통해 의료 정책 및 제도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지식과 경험을 공유했다.

서울시의사회에서는 '의대 정원 증원 및 의정 갈등'을 주제로 국내의 현실을 공유하였고, 타이베이시의사회에서는 "완벽한 의료네트워크 구축을 위한 타이완 의료시스템 통합 소개"라는 제목으로 현재 대만에서 진행 중인 수직적·수평적 의료통합시스템을 소개했다.

대만 측 발표에 따르면 이 통합돌봄모델을 통해 중복검사율이 27% 감소했고, 환자의 전원 대기시간은 35% 단축되었으며, 의료비용 감소 효과는 18%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대만 측은 의뢰시스템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형병원 진료를 원하는 대중들의 고착화된 습관, 자원과 환자를 공유하려 하지 않는 의료기관 간의 치열한 경쟁, 벽지 지역의 1차의료 자원 부족, 의료단위마다 다른 정보시스템 표준 사용에 따른 기술적 한계 등 여전히 현장에서 겪고 있는 고충들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한편, 이에 대해 한국은 건강보험 청구자료와 심사평가 인프라는 매우 발달해 있지만, 개인정보보호법과 의료정보 보호 규범이 엄격하고 기관 간 정보 연계에 대한 사회적 민감성이 높아 대만식의 보험자 중심 통합 플랫폼을 그대로 도입하기는 쉽지 않겠다는 시사점을 얻기도 했다.

이후 2025년 10월에는 타이베이 현지에서 개최된 타이베이시의사회 창립 80주년 기념식에 서울시의사회 임원들이 공식 초청을 받아 참석하며 양 단체 간의 우정과 신뢰를 더욱 공고히 했다.

비슷한 의료제도적 토대 위에 놓인 두 나라의 의사회는 결국 비슷한 고민을 안고, 각국의 시스템 내에서 어떻게 하면 국민 보건에 더 잘 기여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당장 교육·수련 정상화, 필수의료 회복, 국민 신뢰 회복이라는 절박한 당면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 의료계가, 이제는 거대 담론이나 대의명분, 구호에만 사로잡히기보다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방향으로 이 위기를 슬기롭게 수습해 나가야 할 때다. 앞으로 타이베이시의사회와의 지속적인 정책적 교류와 소통이 우리 의료계의 혜안을 넓히는 데 더 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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