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과 4학년 초, 내과 실습을 돌 때 나는 매일 회진 대열의 맨 뒤에 서 있었다. 교수님과 전공의 선생님들이 앞장서고, 나는 그 뒤를 따라다니며 아이패드로 차트를 넘기고 고개를 끄덕이는 역할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회진 시간, 교수님이 다음 환자에게 갈 채비를 하다 말고 나를 돌아보며 물으셨다.
"학생, 이 환자분 아까 검사 결과 설명한 거, 한번 직접 다시 설명해 볼래?"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아이패드를 나도 모르게 꽉 쥐었다. 시선은 아래로 떨어졌다. 고개를 들었을 때 환자분은 궁금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계셨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는 생각에 아이패드를 다시 내려다보며 더듬더듬 설명을 시작했다. 문장 사이사이가 매끄럽지 못했는데도 환자분은 그때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돌이켜보면 그 기회는 내가 만든 것이었다. 그날 아침 회진 전에 그 환자분의 검사 결과가 궁금해서 전공의 선생님께 미리 여쭤보고 함께 차트를 들여다봤는데, 아마 그 관심을 보고 기회를 주신 것 같다. 설명을 마치고 나니 환자분이 "아, 이해가 되네요"라고 하셨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손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그 이후로 실습 태도를 조금씩 바꿔보았다. 회진이 끝나면 궁금한 걸 그냥 넘기지 않고 물어보고, 처치나 드레싱이 있으면 참관을 자청했다. 매번 받아들여진 건 아니었지만, 내가 먼저 관심을 보인 날에는 대체로 뭔가 하나라도 더 해볼 기회가 있었다. 반대로 그냥 뒤에서 지켜만 보던 날에는 별다른 일 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여기서 얻은 건 단순히 '경험 하나'가 아니었다. 검사 결과를 환자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다시 옮기는 일은, 의학 지식과는 결이 다른 별도의 기술이라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다. 어려운 용어를 쉬운 말로 바꾸고, 상대방의 표정을 보며 어디까지 이해했는지 가늠하고, 필요하면 다른 방식으로 다시 설명하는 것, 이건 교과서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라 직접 해보면서만 늘 수 있는 능력이었다.
비슷한 경험이 또 있었다. 응급실 실습 때, 환자의 보호자가 대기실에서 불안해하며 이것저것 물어오신 적이 있다. 원래는 전공의 선생님이 설명할 몫이었지만, 마침 자리를 비운 사이 보호자분이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붙잡고 "어떤 상황이냐", "위험하지는 않냐"고 물으셨다.
정확한 진단 및 치료까지는 내가 답할 수 없었지만,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 차분히 설명하고 나머지는 선생님께 다시 여쭤보시라고 안내했다. 별것 아닌 대응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 순간 보호자분의 표정이 조금 풀리는 걸 보면서, 정보를 정확히 아는 것 못지않게 상대의 불안을 알아채고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걸 배웠다.
이런 상황들을 겪으며 나름대로 도움이 됐던 방법도 하나 있다. 설명을 마친 뒤 "제가 말씀드린 내용 중 이해 안 되는 부분 있을까요?"라고 물어보는 것이다. 처음엔 이런 질문이 어색하고 실례가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막상 해보니 환자분이 오해하고 있던 부분이 그 자리에서 바로 드러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설명을 잘했다고 느낀 순간과 실제로 환자가 이해한 정도가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걸, 이런 확인 과정을 거치며 알게 됐다.
이건 앞으로 의사로 일하면서 매일 써야 할 능력이기도 하다. 진단을 정확히 내리는 것만큼이나, 그걸 환자에게 제대로 전달하는 일이 실제 진료의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걸 학생 때 미리 조금이라도 연습해본 것과 아닌 것은 꽤 다를 거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 외래에서 만성질환을 관리하거나 퇴원 후 주의사항을 안내하는 일처럼, 앞으로 반복해서 마주할 상황들일수록 이런 연습의 가치는 더 클 것 같다.
같은 병동, 같은 기간을 돌아도 누군가는 여러 번 환자와 직접 대화할 기회를 얻었고, 누군가는 그러지 못한 채 넘어간다. 이 차이의 상당 부분은 실습 환경보다 얼마나 먼저 묻고 나서느냐에 달린 것 같다. 물론 아무리 적극적으로 나서도 병동이 바쁘면 기회 자체가 없기도 하고, 매번 나서는 게 쉽지만은 않다. 그래도 가만히 기다리는 것보다는 서툴게라도 먼저 물어보는 것이 배우는 게 더 많았다.
졸업을 앞두고 보니, 실습에서 무엇을 얻었는지는 결국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웠는지에 달려 있었다. 특히 환자와 소통하는 법은 정해진 커리큘럼으로 가르쳐주기를 기다리기보다, 실습 중에 스스로 부딪혀보며 익혀야 하는 부분이 크다고 느낀다. 손에 힘을 꽉 쥐고 시선을 떨어뜨렸던 그 몇 초가, 지금 돌아보면 뒤에 서서 보낸 시간보다 더 또렷하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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