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이후 이명박 정부의 행보를 보면 건강보험 요양기관 당연지정제는 폐지(혹은 완화)될 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렇게 된다면 그 공은 전적으로 의사협회로 돌아갈 것이다. 의사협회는 대선전부터 당연지정제 폐지를 가장 목청 높여왔었다. 그러나, 의사협회는 당연지정제 폐지가 과연 의사, 특히 개원가에게 어떤 이해득실로 귀결될 것인지에 대해 충분한 고민은 하였는지 의심스럽다. 당연지정제 폐지가 오히려 의사들의 목을 죄여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과연 의사협회의 선택이 의사들로부터 환호의 박수를 받을까 아니면 짱돌을 맞을 것인가.
당연지정제 폐지를 둘러싼 이해관계 대립은 매우 첨예하다. 단지 그것이 전혀 수면위로 떠오르지 않았을 뿐이다. 당연지정제 폐지가 의료체계 및 국민에게 미치는 악영향은 제껴두고 의사의 관점에서만 조심스럽게 분석을 해 보도록 하자.
얼마전 주수호 회장은 당연지정제 폐지후 선별계약제(혹은 개별계약제)가 아닌 동등계약제(혹은 단체계약제)를 주장한바 있다. 공단의 요구인 선별계약제로 된다라면 전면적 파업도 불사하겠다라는 엄포까지 놓았다. 주수호 회장의 발언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당연지정제 폐지가 무조건 의사에게는 득이 될 것이라는 의사들의 인식을 완전히 뒤집는 발언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당연지정제 폐지가 의사에게 오히려 부메랑이 되어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계약제가 안고 있는 함정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보험자와 의료기관간의 계약방식에는 두 종류가 있다. 단체계약과 개별계약이다. 의사협회는 당연지정제 폐지후의 공단과의 계약방식은 단체계약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체계약제를 해야 의사단체의 협상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개별계약을 하게 되면 거대한 보험자 앞에 수만의 의료기관들은 각개격파될 수밖에 없다. 주로 비급여 항목을 주로 진료하는 의사를 제외한 대다수의 일차의료기관들은 보험공단과의 계약성사 여부에 따라 생사가 갈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계약을 체결하더라도 보험자가 요구하는 각종 의무조항들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심하게 말하면 노예계약을 강요받게 된다. 당연지정제 폐지가 개별계약제로 귀결된다라면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자살골이 된다. 따라서, 의협으로선 단체계약만이 수용가능한 방식이다. 그나마 단체계약을 통해서 의사협회의 협상력을 최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만일 보험자와의 협상내용이 불만이라면 바로 협상을 깰 수도 있을 것이다. 의사들이 똘똘 뭉쳐 단체 행동이라도 하면 보험자를 꼼짝 못하게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실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의사협회가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진행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설사 단체계약로 되더라도 그 주체는 의사협회로 단일화 되기가 어렵다. 의사협회는 자유로운 가입과 탈퇴가 가능한 조직이 아니고, 보험자 단체와 협상하기 위한 조직도 아니다. 단체계약이 되려면 유럽처럼 보험의사단체가 새로이 결성이 되어야 하고 거기에 가입한 의사들을 대변하는 보험의사단체가 협상을 벌여야 한다. 보험의사단체에는 주로 개원의들이 가입하게 된다. 병원은 개원의와는 달리 따로 조직을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 병원협회가 직접 담당할 수도 있고 이해관계에 따라 대형병원, 중소형 병원, 공공병원, 전문병원 별로 쪼개져 계약을 체결할 가능성도 있다. 즉, 단체계약제하에서도 의사협회가 보험공단과 1대1 협상을 하기는 불가능한 것이다. 개원의들도 또한 이해관계에 따라 몇개 조직으로 나뉘어 질 공산이 있다. 개원가의 이해관계에 따라 보험의사단체에 가입하지 않고 따로 제 2의 보험의사단체를 결성할 수 있는 것이다. 때에 따라서는 진료과별로 찢어질 수도 있다. 의사단체와 보험자사이에 동등한 계약이란 거의 불가능한 셈이다. 단일한 보험공단 대 다수의 의료기관들이 계약하는 방식에서 의사들의 협상력은 급격히 약해진다.
단체계약을 하더라도 의사들의 기대처럼 협상이 깨질 경우 실제 의사들이 집단행동이 큰 힘을 발휘하기도 쉽지 않다. 모든 의사가 100% 단결력을 보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개원가의 결집력은 50%정도에 불과하다. 그럴 경우 집단행동에 동참한 의료기관은 향후 재계약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단체계약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기존의 계약을 유지하거나 개별계약으로 전환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만처럼 말이다.
또 공단과 의사단체간에 단체계약이 이루어지더라도 보험자의 입장에서는 흠있는 개별의료기관을 얼마든지 제외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계약제의 묘미이다. 계약제는 개별의료기관에게 보험자와 계약하지 않을 자유로운 권리를 보장해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험자에게는 특정(!) 의료기관과는 계약을 하지 않거나 계약을 해지 할 수 있는 막강한 권리 또한 보장해준다. 그것이 단체계약이더라도 그렇다. 대만의 경우 단체계약과 개별계약을 동시에 하는데 계약을 했더라도 계약의 조건을 위반했을 경우 중도에 얼마든지 계약을 해지할 권리를 보험자가 가지고 있다. 예로, 주요 보건의료법규 위반, 허위 부정청구 등으로 처벌받은 의료기관은 계약에서 제외되며 그외 의료기관의 의무조항 위반, 임의비급여 규정위반 등에 대해서는 계약을 해지하거나 수개월간 계약을 중지할 수 있다.
개별계약이 아닌 단체계약제로 가더라도 의사협회가 보험자와 동등한 협상력을 갖기는 어려운 것이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의사들이 보험자보다 더 강력한 협상력을 가진 나라는 없다. 진료비에 대해 환자와 의사간에 직접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 이상 의사들은 보험자에 청구할 수밖에 없다. 돈줄은 보험자가 쥐고 있는 때문이다.
그렇다면, 보험자의 협상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건강보험을 쪼개거나, 대체형 민간보험을 허용하면 어떨까? 우선 전자의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합치기는 쉬워도 쪼개는 것은 어렵다. 통합 이전으로 되돌리더라도 우리나라 건강보험의 특성상 공단의 협상력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공단을 쪼갠다고 해서 서로 경쟁하는 것도 아니다. 통합이전의 공단이 서로 경쟁하였던가를 생각해 보라.
결국 대체형 민간보험으로 건강보험과 경쟁시키는 방법이 남는다. 그러나, 이 방법도 실제로 보험자의 협상력을 약화시킬 수는 없다. 오히려 1을 반반씩 나누어 협상력이 반으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힘센 놈이 둘이 되는, 1+1로 2가 될 공산이 크다. 왜냐면 보험자 입장에서는 모든 의료기관과 계약을 굳이 할 필요가 없다. 보험자의 입장에서는 아쉬울게 전혀 없다. 일부 의료기관하고만 계약을 함으로써 보험 재정도 절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협상력도 높일 수 있다. 의료기관의 입장에서는 이중고에 시달릴 가능성이 크다. 이유는 민간보험과 건강보험이 서로 자유 경쟁을 할 것이라는 명제는 거짓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의료기관과 서로 계약하려고 경쟁을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의 현상, 즉, 의료기관들이 앞다투어 보험자와 계약 체결을 위해 서로 경쟁하는 현상이 벌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자, 나는 단체계약을 하더라도 의사들의 협상력이 큰 힘을 발휘하거나 상대방의 협상력을 꺽지는 못할 거라 본다. 물론 의사협회는 내 시각이 틀렸을 거라 믿을 것이다. 그래, 내 주장이 틀렸다고 가정해 보자. 의사협회의 주장대로 단체계약을 하면 의사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쟁취할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현실 정세의 역관계에서 단체계약제를 따낼 수는 있을까?
주위를 잘 살펴보자. 당연지정제 폐지를 찬성하는 의사협회의 우군은 도처에 널려 있다. 우선 새로이 들어선 이명박 정부, 재계, 그 산하 연구소들, 의료산업화를 주장하는 학계, 보험회사들, 병원협회 등등. 그렇다면 그 중에 의사협회의 주장인 단체계약제를 찬성할 만한 세력은 누가 있을까? 기껏해야 병협 정도? 하지만, 병협은 의협과 분명히 따로 갈 것이다. 내가 볼때 의사협회 외에는 없는 것 같다. 모두 개별계약을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보험회사들이야 당연히 개별계약을 선호할 것이다. 재계의 이해를 대변하는 삼성경제연구소의 ‘의료서비스산업 고도화와 과제’를 찬찬히 살펴보라. 그 paper는 분명히 단체계약이 아닌 개별계약제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의사의 편보다는 민간보험회사의 편으로 보인다. 즉, 재계를 위시한 의료산업화론자들, 보험업계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들, 보험공단은 단체계약제가 아닌 개별계약제를 선호한다. 단순히 선호차원을 넘어서 강력히 주장한다. 따라서 당연지정제 폐지 이후 계약방식을 둘러싼 논의에서 의사협회는 고립될 가능성이 크다. 현실적 역관계상 단체계약제를 하기란 매우 어려운 조건인 것이다. 설사 의사협회가 똘똘 뭉쳐 단체계약제를 따낸다고 해도 내 눈엔 여전히 자살골이지만 말이다.
의사협회 주장대로 강제지정제를 시행하는 나라는 OECD국가 중에는 우리밖에 없다. 맞다. 의사들은 그것을 의료사회주의라 비판하지만 강제지정제는 역사적으로 군사정권의 작품이다. 지금 당연지정제 폐지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는 이유는 단지 강제시행하는 나라가 우리나라밖에 없기 때문이 아니다. 의료상업화를 위해서, 건강보험을 붕괴시키기 위해서는 당연지정제 폐지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당연지정제 때문에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나 나중에 순망치한의 후회를 할 수도 있다. 계약제를 둘러싼 이해관계를 면밀히 살펴보길 바란다. 계약제 실시는 의사들만이 주장하는 게 아니다. 건강보험공단이 주장한다. 왜? 재계 산하 연구소들도 주장한다. 왜? 의료산업화론자들도 주장한다. 왜? 민간의료보험사들도 주장한다. 그들은 왜? 근데 우리 의사들은 또 왜? 첫번째 질문에만 답변하련다. 보험자의 입장에서 계약제는 매우 강력한 의료기관 통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의사들은 어리석게도 계약제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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