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론부터 말하면 “일부 의약품의 약국 외 판매”를 허용해야 한다. 이것을 부정한다면 인간의 자율성 즉 자기 결정권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 전근대적 발상일 것이다. 국가의 제도든 전문직이든 상대를 구속하는 경우는 무조건 최소화되어야 한다. 이른 아침 배가 아픈 어느 샐러리맨의 예를 들여다보자.
그는 아침 기상 직후 설사하면서 배가 아팠다. 복통은 갈수록 심해졌으나 응급실에 갈 정도는 아닌 것 같고 회사에 제 시간에 꼭 가야할 일도 있다. 동네 슈퍼에서 의약품을 판매하지도 않고, 그 시간에 의원이나 약국은 문 열지 않았을 것이다. 할 수 없이 그냥 출근하고 경과를 봐가며 대처하기로 선택’을 할 것이다.
첫째, 아픔에 대처하는 개인의 치유 선택(healing option)은 ‘자기 결정권’으로 반드시 존중되어야 한다. 이것은 넓은 의미의 ‘자율성’으로 단순히 환자의 편의를 위한다는 차원을 넘는 함의를 갖는다. 치료를 받고 안 받고 여부, 치유 방법의 선택과 경로 등은 개인적 사정 혹은 다양한 가치관에 따라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예에서 보듯 샐러리맨은 자가 진단을 하지만 자가 투약이 제도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로 인한 개인적 고통은 물론이고 사회적 손실은 엄청날 것이다.
둘째, 전문지식이라 하더라도 일상지식으로 편입되면 그것은 상식에 속한다. 가까운 예로 머리가 아프면 일단 지켜보고 진통제를 먹는다. 피부에 상처가 나면 소독약을 바르거나 일회용 반창고를 붙이고 경과를 본다. 이런 선택은 의학 지식에 맞기도 하지만, 이렇게 상식화된 전문지식은 의사의 상담을 거치지 않고 일반인들이 곧바로 사용할 수 있다. 따라서 의료인인 의사의 개입이 필요 없다. 비의료인인 약사의 조력(助力)은 끼어들 여지도 없다. 안전성과 효과성이 입증된 일부 의약품만 허용되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의약품의 사용에 안전성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한국인의 문맹률은 매우 낮아 약품 라벨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복어탕 요리에서 보듯이, 무슨 자격증 소지자가 있어야 가능한 게 아니다. 그리고 효과성을 살펴보면, 자전거의 체인이 빠지거나 자동차의 팬벨트를 교체해야 할 경우 그 분야의 전문가만이 해야 된다는 법이 있는가? 모든 분야의 전문지식은 그 일부가 상식화되고 있으며 그 지식의 사용은 개인들이 결정하는 게 너무 당연하다. 의학과 약학 지식은 전문가들만이 행사할 수 있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일부 의약품의 슈퍼 판매가 불가하다는 구구한 주장들이 난무하나 대부분 억지에 불과하다. 이런 주장들은 대개 개인의 자율성이나 지식의 관점에서 말하지 않는다. 일부 의약품의 슈퍼 판매는 적어도 전문직의 이익이나 직무 범위를 고려하여 결정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경제적 이해 때문에 슈퍼 판매가 지연되고 있다면 정부는 약사들에게 손실을 보전해주어야 한다. 정부가 운영하는 건강보험 기금이 상당히 절약될 수 있기 때문에, 환자들의 수진율이 감소하여 의사들은 진찰비, 약사에게는 조제료의 손실이 초래될 수 있다. 의료기관이나 약국은 꼭 필요한 사회제도이므로 당연히 적절한 수입이 예상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의 지적(知的) 발전을 막는 암적인 존재는 바로 ‘제로섬’의 논리이다. 아마 경제학에서 사용하는 개념인 듯한데 의약(醫藥)의 대체재(代替財) 논리도 비슷하다. ‘환자의 불행은 의사의 이익’, ‘약사의 손해는 의사의 이익’ 등이 그러하다. 이것은 사실도 아니지만 이런 식의 접근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OTC의 슈퍼 판매는 건강에 대한 국민 개인의 자기 결정권 존중이라는 관점에서 처리되어야 한다. 이것이 또한 선진 한국에 맞는 사회 변동일 것이다.
박호진
1977, 서울의대졸
1986. 청주 박내과의원 원장
2008, 사회학 석사(청주대학교)
현재 의협 중앙윤리위원, 전 보험이사
현재 의료와사회포럼 정책위원
번역서: <의료사회학>, <프로페셔널리즘>
논문: <한국의사의 탈전문화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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