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라는 항암제 신약 개발이 보도되면, 많은 암 환자들이 그 약에 대해 물어온다. ‘A라는 항암제가 미국에서 개발되어 FDA 허가는 받았으나, 환자의 15%에서만 효과가 있고 생존연장 효과도 수개월에 불과하여 유럽에서는 아직 인정을 받고 있지 못한 상태로, 우리나라에서도 허가를 받지 못해 수 천 만원에 달하는 약가를 본인이 부담해야 하므로 약효에 비해 경제적 부담이 너무 크다’고 설명하면 환자와 보호자들은 크게 실망한다.
신약에 대한 언론 보도의 대부분이 그 약을 개발해서 판매하는 다국적 제약회사들이 제공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에도 일반인들은 그 정보를 절대적인 것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다. 특정 단체가 목적을 가지고 왜곡된 의료 정보를 배포하였을 때, 전문가가 아니라면 의사 들 조차도 그 정보의 진실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문제는 줄기세포 사건 때 이미 경험하였고,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에 대한 진실 논쟁 역시 같은 맥락에서 진행되고 있다.
잘못된 정보가 개인과 사회에게 주는 피해는 어떤 사람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데서 끝나지 않고, 커다란 경제적 손실을 입히기도 하고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경우도 있다. 진료 현장에서 느끼는 잘못된 의료정보의 피해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약이 나오는 세상이지만 이러한 것 들이 얼마나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검증하는 제도가 제대로 작동되지 못하고 있다.
한 예로, 우리나라에 흔한 질환인 B형 간염의 치료제 상당수에 대해 심평원은 1년간만 보험 급여를 인정하고 나머지는 환자 본인이 부담토록 하고 있어 환자들의 불만이 많으나, 장기간 복용할 경우 약제 내성이 생길 위험도 있다. 적절한 투약기간에 대한 근거자료가 없는 상태에서 병원에서는 반복적으로 처방이 내려지고 있고, 심평원에서 행정 관리 측면에서 급여기간이 결정된 대표적 예이다. 그러나 약제 개발자인 다국적 제약회사는 판매촉진에는 열심이지만 문제 해결을 위한 연구투자에는 관심이 없다.
약을 개발한 회사가 제공한 효능과 부작용 정보만으로는 그 약이 한국에 꼭 필요한 것인지 또 유사한 약제와 비교하여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 판단하는 일을 의사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점점 증가하고 있다. 게다가 획기적인 신약으로 소개되는 약제들의 대다수가 기존 약의 효능을 조금 증가시키거나 부작용을 조금 감소시키는 수준임에도 약가는 10-100배인 경우가 많아 엄청난 비용을 부담하고 있다.
특정 약제의 효과가 인종에 따라 다르고, 또 사회적 환경이나 문화적 배경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기 때문에 선진국에서 승인된 약제라고 무조건 받아들일 수는 없다. 이 때문에 신의료기술이 우리나라에서 어느 정도의 효용이 있는지 평가하는 ‘공익적 임상연구’의 결과를 바탕으로 한 행정 운영이 반드시 필요하다.
의료시장은 점점 팽창하여 GDP의 6%를 상회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의료기술들은 임상연구자료가 충분하지 못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런 의료행위가 과학적 근거에 입각하여 이루어지도록 국가 차원에서 제도를 정비해 나가면, 의료의 질이 높아져 의료서비스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향상될 것이고 국가적으로는 불필요한 건강보험 재원의 낭비를 줄이게 될 것이다.
선진국들은 이미 의료에 관한 근거자료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이를 자국민에 대한 의료행위의 결정이나 보건의료정책에 반영하는 국가적인 기구를 운영하고 있다. 대표적인 기구가 영국의 NICE (National Institute of Health and Clinical Excellence)와 프랑스의 HAS 등이다. 이 같은 세계적인 흐름에 맞추어, 우리나라도 2008년 2월 국회에서 ‘한국보건의료연구원’을 설립하는 법규정을 통과시킨바 있다. 이 기구의 활동이 우리의 의료 수준을 근거중심으로 한 단계 높이는 기회가 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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