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문에서 페리스틸로 들어가려면 몇 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페리스틸이라고 부르는 것은 동서 양측에 몇 개의 기둥들이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계단을 올라 뒤로 돌아보면 디오클레니우스황제의 공적 사적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있고, 난간이 있다. 황제는 그 난간에 나와서 시민들에게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페리스틸의 동쪽에는 성 돔니우스 성당과 종탑이 서 있다. 본래 이 자리에는 디오클레니우스 황제의 영묘가 있었다고 하는데, 뒷날 가톨릭이 공인된 다음에 영묘를 해체하고 성당을 지었다는 것이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두얌성인(Sveti Dujam) 혹은 두예성인(Sveti Duje)라고 부르는 성 돔니우스는 스플리트의 수호성인이다. 지금의 터키, 안티옥에서 태어나 305년 스플리트 인근의 살로나(지금의 솔린 근처)로 와서 주교가 되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기독교박해 기간 동안 7명의 신자들과 함께 순교했는데, 박해자인 황제의 영묘가 있던 장소에 박해를 당한 성인을 기리는 성당을 세운 것은 아이러니하다고 할까, 아니면 꼭 그래야 했을까하고 해야 할까 모르겠다.
성당과 종탑을 아울러서성 돔니우스 성당이라고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면 성당은 성모께 헌정된 것이며, 종탑이 성 돔니우스에게 헌정된 것이다. 종탑은 12세기 무렵 세워졌지만, 성당은 7세기경에 세워져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가톨릭 성당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 돔니우스 성당은 각각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주된 공간은 3세기 말에 세운 8각으로 된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의 영묘이다. 영묘는 궁전을 건설하는데 사용됐던 석회석과 대리석, 벽돌 등의 자재로 지었다. 17세기 무렵 영묘의 동쪽벽을 헐어 합창단석을 만들었다.
종탑은 1100년 경에 로마네스크양식으로 지었는데, 1908년에 재건축하는 과정에서 로마네스크양식의 조각들이 대부분 제거되었다. 성 돔니우스성당의 나무문에 새겨진 예수의 일생을 담은 14개의 장면은 중세 크로아티아의 조각가이자 화가인 안드리아 부비나(Andrija Buvina)가 1220년경 제작한 것으로 크로아티아에 있는 대표적인 로마네스크양식의 조각이다.(1)
종탑과 성당, 지하실 그리고 보물실 등을 패키지로 묶어 구경할 수 있다고 하는데, 좁고 가파른 계단을 통해 종탑에 오르면 스프리트 항구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노고를 보상받고도 남는다고 한다. 우리는 이미 해가 진 다음에 도착해서 그런 즐거움을 맛볼 기회도 없었다. 궁전의 야경을 즐기는 것으로 그 아쉬움을 대신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페리스틸의 북쪽 끝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성 돔니우스성당과 종탑의 전체 모습을 볼 수 있고, 조금 더 가면 궁전의 동문인 은의 문을 볼 수 있다. 성벽에 붙여 지은 호텔이 눈길을 끈다. 성벽의 일부가 무너진 모습이 애처로운 것에 비하면 낫다고 할까?
페리스틸에서 일행을 모아 성당과 궁전의 구조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한 가이드는 일행을 북문 쪽으로 이끈다. 북문은 최근에 복원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성의 북벽은 총탄자국이 여전히 남아 있는 등, 세월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 쉽지 않을 듯하다. 북문 밖에는 닌(Nin)의 주교 그레고리(Gregory of Nin/Grgur Ninsk)의 동상이 서 있다. 닌은 달마시아지방의 작은 마을이다. 지금은 작은 마을에 불과하지만 크로아티아 역사에서는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달마시아 지역에 이주해온 크로아티아민족들은 8세기말에 이르도록 통일된 국가형태를 이루지 못하고 크고 작은 공동체가 난립하고 있었다. 그레고리주교는 라틴어가 아닌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사용하는 슬라브어로 미사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주장은 당시 닌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우던 토미슬라브의 마음을 움직였다.
토미슬라브는 비잔틴제국의 크로아티아 공작령의 첫 번째 공작이었지만, 925년 크로아티아왕국을 건설하여 왕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 무렵 크로아티아왕국은 불가리아와 헝가리 등 주변국가들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926년 토미슬라브왕은 비잔틴과 제휴하여 보스니아 고원지대에서 불가리아왕국과 전쟁을 치루기도 했다.
토미슬라브왕은 또한 925년 교황 요한 10세가 스플리트에서 주최한 교회평의회에 출석하여 지금까지 사용해오던 라틴어대신 슬라브어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와 크로아티아지역에 대한 교회사법권을 인정하라고 주장하였다. 교황은 슬라브어 사용을 금하려 하였지만, 평의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교회사법권은 크로아티아주교 그레그리 대신 스플리트의 대주교에게 권한을 주는 것으로 정리되었다.(2)
라틴어가 어려워 교회를 외면하던 크로아티아 국민들은 자국어인 슬라브어로 미사를 드리게 되자 교회로 몰려왔고, 신생 크로아티아왕국은 교회를 중심으로 국민들을 결속시킬 수 있었다. 교회를 통하여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게 된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헝가리, 오스트리아 등 주변 강국들 틈바구니에서도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지켜나갈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 특히 스플리트사람들의 정체성은 제2차 세계대전 기간 중에 잘 나타났다. 나치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권은 스플리트를 점령하여 동유럽과 발칸을 공격하기 위한 거점으로 이용하려했지만 스플리트 주민들은 나치즘과 파시즘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주민의 3분의 1이 티토가 이끄는 반나치 저항운동 파르티잔에 자원할 정도였다.
당연히 시가지가 포격을 받고 수천 명의 주민이 죽는 피해를 입었다. 전후 티토는 스플리트에 조선소를 건설하여 유고급 잠수함을 건조하고, 해군기지를 운용하는 등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크로아티아가 유고연방으로부터 탈퇴하여 독립한 뒤에는 연방이 투자를 회수하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관광산업이 발전하면서 빠르게 회복되고 있다.(3)
그레고리주교의 엄지발가락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 동상의 엄지발가락이 반질반질하다는데, 만져볼 틈도 없이 가이드에게 이끌려 허브가게로 향했다. 교포가 한다는 허브가게에서 한 시간 가까이 보낸 끝에 다시 페리스틸로 돌아와 쥐꼬리만한 자유 시간을 얻었다.
하지만 번갯불에 콩구워 먹듯 돌아본 곳들을 찬찬히 챙겨보기에도 빠듯한 시간이라서 꽃보다 누나에 출연했던 배우가 헤맸던 남문밖 해안에도 나가보지 못했다. 버스를 타기 전에 잠시 일별한 해안에 늘어선 노점들은 이미 문을 닫았고 성벽에 들어있는 가게들도 이미 파장분위기였던 것이다.
하긴 궁전 곳곳에서 카메라의 앵글을 가득 채우는 바람에 셔터누르기를 망설이게 하던 관광객들도 어느 사이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는지 군더더기 없는 화면을 구성할 수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어둠이 내려 화면이 너무 컴컴한 것이 문제다.
#i5#8시가 가까워서야 오늘 묵기로 한 비오그라드로 출발을 했고 9시가 다되어서 숙소에 도착했다. 로비 뿐 아니라 복도까지 조용한 것을 보면 우리 일행만 묵는 것 같다. 숙소에 가방을 던져놓고 곧바로 식당으로 향한다. 메인으로 나온 소고기와 닭고기 요리가 조금은 짠듯했지만 그런대로 먹을 만해서 다행이다. 저녁식사가 늦었기에 후식을 고사하고 방으로 올라갔다.
옷을 갈아입다 보니 오른쪽 허벅지 안쪽에서 뒤쪽으로 넘어가면서 널찍하게 멍들고 작은 출혈이 흩어져 있다. 통증도 없고 어디에 부딪힌 기억이 없어 더욱 찜찜하다. 큰 아이에게 카카오톡으로 사진을 보내려 해도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는다. 출혈이 지속되는 응급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아 일단은 덮어두기로 했다. 백혈병 같은 심각한 병은 아닐거라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고 아내도 안심을 시키지만 마음 한 구석은 불편하다.
이 문제는 귀국한 다음에 병원에 가서 혈액검사를 정밀하게 받은 결과가 모두 정상으로 나와 별일이 아닌 것으로 최종 결론을 지었다. 생각해보니 그날 두브로브니크에서 스플리트로 이동하면서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잠이 깊이 들었고, 좌석이 조금 불편했던 것 같다. 좌석이 조금 꺼진 탓에 허벅지가 좌석 끝에 눌렸던 것이다. 문제는 깊은 잠에 빠지는 바람에 피부가 압박을 받으면서 약해진 모세혈관이 터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버스에서 깊이 잠드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오늘 숙소는 지은 지 얼마되지 않는 듯 깔끔하고 널찍하다. 아마도 도시를 벗어난 소읍에 숨어있는 진주 같은 곳이 아닐까. 플리트비체 가는 단체를 노린 전략이 아닐까 싶다. 다음날 날이 밝은 뒤에 숙소 주변을 둘러보니 커다란 수영장에 따로 어린이 풀장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배구장과 실내 농구장도 있다. 그 뒤로는 멀리까지 숲이 이어져 있어 상쾌함을 더한다. 숲의 끝에는 호수도 보이는 천혜의 장소가 아닐 수 없다.
비오그라드는 전체적으로 납작납작한 건물들이 나무 사이에 숨어있는 한가로운 전원도시로 삼림을 활용하는 레저도시라고 한다. 도시를 빠져나가는데 널따랗게 펼쳐지는 초지에는 양떼들이 풀을 뜯고 크지 않은 나무들이 이어지고 있어 목가적인 풍경을 완성하고 있다. 정말 살아보고 싶은 도시다.
참고자료
(1) Wikipedia. Cathedral of Saint Domnius.
(2) Wikipedia. Tomislav of Croatia.
(3) 이종헌 지음. 낭만의 길 야만의 길, 발칸 동유럽 역사기행 213쪽, 소울메이트 펴냄,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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