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50분. 서울시 노원구 파티마의원 장현재 원장은 점심시간을 활용해 왕진에 나설 채비를 시작했다. 그는 익숙한 모습으로 왕진가방을 챙긴 후 10년째 그와 함께 하고 있는 사회복지사에게 연락한 뒤 중계동 104번지로 향했다.
"언제부터 한번 와달라고 연락을 받았는데 오늘에서야 가네요. 솔직히 당장 외래에 환자가 있는데 이들을 뒤로 하고 왕진을 나가는게 쉽지 않아서…"
차로 10분쯤 달려서 도착한 곳은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 '백사마을'로 알려진 중계동 104번지. 주민 상당수가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한 이들이 많다. 장 원장은 1997년 IMF 외환 위기 당시 이 마을 초입에 개원하면서 연을 맺은 이후 지금까지 왕진을 다니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마을 주민치고 장 원장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날 왕진을 요청한 환자는 김말순(가명·85세)할머니. 10여년 전 당뇨로 오른쪽 발을 절단한 이후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되면서 병·의원 진료도 어려워졌다.
동네 특성상 문 밖을 나서면 계단과 내리막길인 탓에 혼자 집 밖 외출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고 선생님, 바쁜데 어떻게 오셨어."
"한번 온다 온다하고 못와서 오늘 작심하고 왔어요. 당 수치부터 확인할까요? 어깨랑 배는 괜찮으시고요?"
"늘 아프지 뭐. 휠체어 타니까 어깨도 늘 아프고."
"그럼 주사(근육내자극주사) 한대 놔드릴까요?
장 원장이 할머니와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 받으며 간단히 진료를 마치자 어느새 10분이 흘렀다.
"할머니, 다음에 또 올께요. 방은 깨끗하네요. 요양보호사는 잘해줘요? 심심할 때 말벗은 되죠? 불편한 점 있으면 사회복지사나 요양보호사한테 얘기하시고요."
"아이고 고마워. 이 의사양반은 참 고마운 사람이야. 명절날에 나 한명을 치료해준다고 일부러 집까지 찾아와줬잖아. 10년도 다된 얘기지만 아직까지도 고맙지뭐야."
오랜 세월 함께한 탓일까. 장 원장은 할머니의 건강뿐만 아니라 방 상태는 청결한지, 우울감은 없는지, 식사는 잘하고 있는지 등을 두루 챙겼다.
왕진을 마치고 병원으로 돌아오니 어느새 12시 40분경. 환자 한명만 다녀왔을 뿐인데 50분이 훌쩍 지났다. 이렇게 진료하고 청구할 수 있는 요양급여비용은 일반 진찰료 및 진료료 이외 소정의 교통비 정도가 전부다.
그마저도 백사마을 노인 환자 상당수가 생활형편이 어렵다보니 별도의 교통비는 기대하기도 어렵다.
"개인적으로 봉직의 의사가 한명 더 있으니 가능한 일이죠. 저도 혼자 개원하면서 왕진은 쉽지 않아요. 별도 수가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고령화시대에 거동이 불편한 환자는 늘어가는데 점점 더 필요할 것이라고 봐요."
10년째 왕진하며 다듬어진 한국형 '커뮤니티 케어' 모형
사실 장 원장의 왕진은 단순히 일회성 진료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97년부터 쌓아온 노하우를 기반으로 나름의 시스템을 구축한 것.
그의 왕진 시스템은 '의사 및 방문간호사-사회복지사-요양보호사'가 유기적으로 맞물려 돌아간다.
일단 사회복지사가 한달에 한번 꼴로 해당 환자의 집을 방문해 불편한 부분은 없는지 등을 파악하고 의료적 지원이 필요한 부분은 장 원장과 공유한다.
이와 함께 요양보호사에게도 해당 환자가 필요로 하는 (돌봄)서비스를 전달하며 요양보호사는 매일 방문해 환자의 상태를 살피고 청소 및 말벗을 해준다. 이 과정에서 의료적 처치가 필요한 부분은 장 원장에게 전달한다.
그럼 장 원장은 사회복지사와 요양보호사를 통해 받은 정보를 기반으로 방문간호 지시서를 작성해 욕창케어 등 간호 서비스를 하도록 조치하고, 의료적 처치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직접 왕진을 나간다.
이날 왕진을 받은 김 할머니처럼 거동이 불편한 경우 장 원장이 처방한 약을 직접 가져다 줄 형편이 안될 때 사회복지사가 대신 전달을 하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장 원장은 인근에 거주하는 장기요양보험 대상자 환자의 상태를 거의 파악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지난 2008년 노인장기요양보험 도입에 발맞춰 병원 내 재가복지센터를 설립, 사회복지사(4명)와 요양보호사(80여명)를 채용하고 있기에 가능했다.
다른 재가복지센터와는 의사인 장 원장이 시설장인 덕분에 사회복지적 측면인 '돌봄'케어 이외 '의료'적 케어가 가능하다. 의료기관이 재가복지센터를 운영함에 따라 '의료'라는 테두리 내에 '복지'를 녹여낸 것.
김 할머니처럼 필요한 경우 왕진을 통해 만성질환을 수시로 케어해 결과적으로 응급실 등 상급 의료기관 의료비를 줄이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최근 정부가 막대한 재정을 쏟으며 관심을 보이고 있는 '커뮤니티 케어' 한국형 모형을 마련한 셈이다.
이날 왕진을 마치고 돌아서며 장 원장은 노인환자의 노년의 삶의 질을 고려할 때 '왕진'시스템이 확산, 정착됐으면 하는 게 바람을 드러냈다.
"촉탁의사로 인근 요양원에 100명 가까운 환자를 보고 있는데 가끔 가보면 안쓰러워요. 개인적으로 모든 환자가 집에서 행복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시설이라는게 아무리 좋아도 규제가 필요할테고. 요양보호사, 사회복지사의 지원을 받고 의사가 의료적 케어를 해주면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거든요. 제가 왕진가는 환자들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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