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2000년대 IT 버블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요새는 '혁신'이라는 단어를 안붙이면 무슨 구닥다리 굴뚝 사업 같은 취급을 받는다니까요."
최근 만난 국내 의료기기 기업 대표이사의 한숨섞인 푸념이다. 그는 20여년 넘게 의료기기 기업을 이끌어가면서 지금과 같이 답답한 적이 없었다고 털어놨다.
대통령 공약으로 선정되고 보건복지부는 물론 기획재정부와 산업통상자원부 등 사실상 범 부처 단위에서 의료기기 분야를 차세대 먹거리로 내세우고 있는 지금. 왜 그의 푸념은 더욱 커져만 가고 있는 것일까.
이에 대한 배경은 최근 복지부가 공개한 의료기기산업 육성 지원 종합 계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번에 공개된 종합계획은 2023년부터 2027년까지 5년간 국내 의료기기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정부 차원의 제도 개선 및 투자안이 들어있다.
그만큼 공개전부터 의료산업계의 관심을 받아온 것이 사실. 우리나라의 경우 규제와 예산, 보험까지 정부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점에서 결국 정책 방향이 생존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뚜껑이 열리자 의료기기 기업들의 반응은 냉담하기만 하다. 국내 기업을 육성한다면서 국내 기업들의 수요와 요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종합계획을 살펴보면 초점은 체외진단기기와 치과용 의료기기 등 이미 대규모 수출노선을 갖추고 있는 분야와 의료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디지털치료기기 등 혁신 기술에 맞춰져 있다.
이에 대한 R&D 예산을 대폭 확충하고 임상실증을 도우며 예산과 인프라를 동원해 스타트업 단계의 기업을 유니콘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것이 골자다.
기대를 모았던 규제 개선방안도 마찬가지다. 혁신 기술의 신속한 의료현장 진입을 위해 임상시험 승인을 간소화하고 심사 기간을 줄이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일선 의료기기 기업들의 한숨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로 '의료기기'로 불리는 제조업에 대한 지원 방안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의료기기의 수입 비중이 높아 국산화를 도모해야 한다면서 정작 이를 개발하고 제조, 생산하는 기업들은 소외되고 있다는 것이 이들의 지적.
당장 의료기관에서 필요한 치료재료 등 '실물'을 만드는 곳이 의료기기 제조업인데 이에 대한 지원은 늘 뒷전이라는 푸념이 녹아있다.
물론 의료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디지털헬스 등은 피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며 아직까지 시장 지배 기업이 없다는 점에서 전폭적 투자를 통해 글로벌 시장을 노릴만한 가치가 있는 분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당장 환자에게 필요한 의료기기를 생산하는 기업들은 도산을 걱정하고 있다.
코로나의 긴 터널을 겨우 견뎠지만 킹달러와 원자재값 이상, 물류 비용 폭등 등으로 계속해서 펀치를 맞으면서 살려달라는 절규를 지속하고 있다.
그 중에는 당장 공장이 멈추면 수술방 운영이 불가능해지는 품목들도 존재한다. 제2의 고어 사태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 이들과 의료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물론 혁신 의료기기는 국내 의료기기 산업의 미래를 짊어질 차세대 먹거리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 미래 또한 현재가 있어야 가능하다. 산업의 발전이 아닌 유지를 위해 '비혁신' 기업들의 목소리도 외면해서는 안된다.
"당장 치료재료 공장 문 닫게 생겼는데 인공지능으로 환자 수술할겁니까?" 이 자조섞인 농담을 웃으며 넘길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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