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한 해 살림살이를 결정짓는 수가협상 시한이 약 한 달 앞으로 다가왔지만 밝지 않다. 협상 당사자인 건강보험공단과 공급자 단체 모두 내·외부 현안에 매몰돼 정작 수가협상은 오히려 뒷전으로 미뤄지는 모습이다.
예년이라면 통상적으로 이뤄지던 일정들이 차일피일 늦어지는가 하면 예전에는 없던 공급자와 가입자의 소통 확대도 불투명해진 상황이다.
건보공단 수장 없는 상견례...시작부터 힘 빠지나
건강보험공단과 수가협상에 참여하는 공급자 단체장은 오는 11일 2024년도 요양급여비 계약 관련 의약단체장 간담회를 가질 예정이다.
단체장 상견례지만 건보공단을 대표하는 이사장은 공석이기 때문에 직무대행 중인 현재룡 기획이사가 참석한다. 상견례 일정도 지난해보다 일주일 더 늦게 예정됐지만 비어있는 기관장 자리는 결국 채워지지 않았다.
통상 기관장이나 임원 공모에 최소 2개월의 시간이 걸린다. 다만, 현 정부 특성상 공모 절차를 진행하더라도 내정자만 정해지면 임명까지는 일사천리로 이뤄지는 특성이 있다. 강중구 건강보험심사평가원장 임명 당시에도 공모 진행부터 임명까지는 2개월이 채 걸리지 않았다.
건보공단 이사장 공모는 4월 중순부터 시작했다. 통상적인 시간을 고려한다면 6월 중순은 돼야 임명이 되겠지만 현 정부 특성을 반영한다면 5월 중순에는 임명이 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현재 6명의 인사가 지원했으며 건보공단 임원추천위원회는 이들에 대한 면접 절차를 거쳐 3~5배수로 추천, 보건복지부 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최종 임명한다.
5월 중순에 임명되더라도 수가협상 시작을 함께 하지는 못하는 상황이다. 기관장 상견례는 수가협상의 시작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상징적인 행사 중 하나인 만큼 협상의 한 축인 건보공단 이사장이 부재하다는 것은 공급자 단체 입장에서는 힘이 빠지는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한 공급자 단체 수가협상단장은 "기관장 상견례는 수가협상 시작을 알리는 상징적인 행사이기 때문에 대세에는 큰 영향이 없다"라면서도 "확실히 기관장 부재 여부에 따라 무게감이 달라지는 것은 사실"이라며 씁쓸함을 보였다.
간호법·의사면허취소법에 총력 의료계, 협상 여력 있나
보건의료 직역이 한 목소리로 반대하고 있는 간호법과 의사면허취소법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의료계는 현재 '총파업' 카드까지 꺼내 들고 대국회 투쟁을 앞두고 있다. 정부도 사태의 심각성을 예견하고 긴급상황점검반을 구성해 만일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 이필수 회장은 단식 투쟁에까지 돌입했다.
이처럼 혼란스러운 정국에 내년 적용될 '수가'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게 사실. 의협도 내부적으로 수가협상단을 꾸렸지만 대내외적인 상황 때문에 수가협상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음에도 아직 확정을 짓지 못하고 있다.
의협 관계자는 "내부적으로 수가협상에 대비해 열심히 자료는 만들고 있는데 대외적인 상황이 워낙 어렵다"라며 "건보공단도 제대로 준비를 못 하고 있는 상황인 것으로 안다. 공급자 단체의 목적은 회원 권익 보호인 만큼 준비는 철저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급자 단체도 대한약사회와 대한한의사협회를 제외하고는 내외부 사정으로 아직 수가협상단 구성을 공식화하지 않았다. 건보공단은 각 공급자단체에 수가협상단 명단 통보를 요구하고 있지만 마무리 하지 못한 것.
우선 대한약사회는 박영달 부회장을 단장으로 하고 이영민 대외협력본부장, 이광희 보험이사, 이용화 보험이사가 협상단을 구성했다. 한의협은 안덕근 보험부회장을 수가협상단장을 맡았으며 한창연 보험이사, 김민규 보험·의무이사, 김주영 보험·약무이사가 협상에 나선다.
반면, 대한치과의사협회는 회장 선거를 거쳐 5월부터 새 집행부가 꾸려지면서 협상단 구성도 늦어지고 있다. 수가협상 역사의 산 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마경화 부회장이 올해도 협상단장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의협과 대한병원협회 역시 수가협상단장만 각각 김봉천 대외협력부회장, 송재찬 상근부회장이 맡기로 했고 구체적인 협상단원은 알리지 않고 있다.
건보공단 재정위는 여전히 미구성…가입자-공급자 소통 요원
내년도 수가 인상에 추가로 투입할 건강보험 재정 규모를 결정하는 조직인 '재정운영위원회' 구성도 여전히 이뤄지지 않았다.
건강보험 재정운영위원회는 건강보험 재정과 관련한 사항을 심의, 의결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로 보건복지부가 구성한다. 건보공단 재정운영위는 직장가입자 대표(노동조합 5인, 사용자 단체 5인), 지역가입자 대표(농어업인 단체 3인, 도시자영업자 단체 3인, 시민단체 4인), 공익대표(관계 공무원 2인, 건강보험 학자 8인) 등 총 30명으로 운영된다.
늦어도 4월 중순에는 첫 회의를 갖고 소위원회를 구성하며 수가협상 채비를 했지만 시작부터 늦어지고 있는 것.
재정위는 가입자 중심 조직이다 보니 공급자 단체는 꾸준히 구성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대한개원의협의회 김동석 회장은 "재정위가 수가인상 투입 재정을 정하는데 의료계 위원은 단 한 명도 없다"라며 "재정위에 공급자 단체가 꼭 포함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수가협상을 거부하는 게 맞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목소리에 건보공단은 그동안의 공급자 측의 의견을 반영하면서 그동안 협상 방식을 탈피해 보겠다는 의지를 일찌감치 드러냈다. 본격 수가협상에 들어가기 전에 공급자와 가입자, 건보공단이 먼저 소통의 시간을 가져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이러한 계획은 물거품이 될 것으로 보인다. 가입자와 공급자가 소통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하기에는 물리적 시간이 빠듯하기 때문이다.
공급자단체 관계자는 "매번 이 같은 협상 방식은 안된다는 말을 반복하지만 결국은 올해도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은 협상을 할 것으로 보인다"라며 "구체적인 일정부터 어긋나고 있는 상황에서 각종 지표들도 의료계에 유리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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