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가 바뀌면 인식이, 사상이 바뀐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국내에서의 장기 기증에 대해선 제도가 먼저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2010년을 기점으로 뇌사자 장기기증 확대를 위한 뇌사추정자 신고 의무제 및 장기조직기증원과 같은 제도와 기구가 도입되면서 장기 기증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죽은 뒤에도 몸을 온전히 보전해야 한다는 유교적 가치관은 장기 기증 활성화의 걸림돌이었지만 그런 인식도 많이 희미해 졌다는 것이 임상 현장의 증언.
가톨릭대학교 은평성모병원 '김수환 추기경 기념' 황정기 장기이식병원장(혈관이식외과)은 그 제도의 변화를 직접 체험한 산 증인으로 통한다.
2009년 혈관이식을 펠로우 전공으로 시작하면서부터 새로운 제도·기구의 도입과 그로 인한 현장의 변화를 몸으로 체감했기 때문.
그가 본 국내 장기 기증 및 이식 현황은 어떨까. 이식 수요와 기증 현황의 격차의 해소 방안 등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기증 꺼린다는 인식 옛말…"기증 선도국"
2010년 뇌사추정자 신고 및 장기구득기관 마련을 위한 법적 장치(장기등이식에관한법률)가 마련됐다.
의료진이 신고해야 하는 뇌사추정자의 기준으로 자발호흡이 없는 치료 불가능한 뇌병변 환자로 하고, 눈뜨기, 언어반응, 운동반응 세가지 영역으로 뇌 손상 또는 의식 수준 저하를 평가하는 GCS(Glasgow Coma Scale) 4점 이하일 경우다.
신고할 때는 뇌사추정자의 상태 및 발생원인 등을 구두, 서면 등의 방식으로 장기구득기관에 알리도록 하여 효율적인 제도 운영이 가능토록 했다.
황정기 병원장은 "우리나라 신장 이식은 연간 약 2000건이 이뤄지고 있다"며 "약 40%인 800명 정도가 뇌사자가 기증하신 장기를 통해 이식을 받고, 나머지 1200명이 생체 기증을 통해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지인이나 가족들을 통한 생체 이식 방식은 웬만한 경우는 다 하시고 있어서 더 늘어날 여지가 크지 않다"며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의 간 이식 생체 공여자는 100만 명당 세계 1위를 차지할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생체 공여로는 신장 이식도 전 세계 2, 3위를 차지할 정도로 활성화 돼 있다"며 "다만 기증자 대비 이식을 원하는 대기자가 많은 속성 상 이분들을 도와드리기 위해선 뇌사 기증자가 더 늘어나는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의 뇌사 장기 기증은 2010년 이후 제도적 강화로 급격한 성장을 이뤘다는 것이 그의 판단.
황 원장은 "2010년도부터 뇌사추정자 신고 의무화가 도입되면서 연간 100명 수준에 머물던 뇌사 기증자 수는 400명 이상으로 증가해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뤘다"며 "2015~2016년 이후 증가세가 둔화되고 있고 코로나 팬데믹까지 겹쳐 우려가 컸지만 다행히 감소하지는 않고 있고 심장과 폐 이식은 더 늘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국민들이 장기 이식에 인색할 것이란 편견이 있지만 이마저도 다 옛말이 됐다"며 "서구권과는 아직 격차가 있지만 아시아 권역으로 한정해서 보면 우리나라는 뇌사 장기 기증이 가장 잘 되고 활성화된 나라로 꼽힌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 의료진들이 베트남, 방글라데시 이런 개도국으로 진출해 뇌사 장기 이식 프로그램의 교육과 자문을 담당하기도 한다"며 "이웃국가인 일본만 해도 뇌사 장기 기증 절차가 까다롭고 복잡해 인구가 더 많음에도 뇌사 장기 기증자의 절대적인 수치가 더 적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의 뇌사 장기 기증 제도는 아시아권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으며, 일본과 비교해도 제도적, 운영적 측면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 그렇다면 과제는 무엇일까.
■"마음의 짐이라는 벽 존재…기증 동의 더욱 간소화돼야"
과거 유교적 전통으로 인해 장기 기증에 대한 거부감이 높았던 것과 비교하면, 최근 기증에 대한 인식은 눈에 띄게 개선됐다. 하지만 장기 기증 희망 등록 시 가족들과 충분한 협의를 거치는 절차가 없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작용하고 있다. 특히 각막 기증 등 일부 분야에서는 여전히 문화적 ·심리적 저항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병원장은 "장기 기증에 대한 국민적 인식 개선이 지속적으로 필요하다"며 "기증자의 사전 동의가 더욱 존중받을 수 있는 환경 조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생전 장기 기증 의사를 밝히고 등록을 했더라도 실제 기증률과는 격차를 보이고 있는 게 사실. 실제 뇌사 추정자의 장기 기증율은 약 25% 미만이라는 추정치도 언급된다.
황 병원장은 "뇌사 전에 환자 본인이 기증 의사를 밝혔다면 가족들이 결정을 내리기 훨씬 수월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고, 가족들이 알아서 기증을 선택하기가 아직은 부담스럽다는 측면이 강한 것 같다"며 "장기 기증 등록 절차가 더욱 간소화되고 수월하게 진행돼야 할 필요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장기 기증 제도를 opt-out 방식으로 바꾸거나, 가족동의를 간소화 혹은 생략하는 법안이 논의되긴 했으나, opt-out방식의 '추정동의(presumed consent)'제도 전환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많은 논의가 필요한 사항"이라고 강조했다.
장기 기증에 대한 인식이 15년 전 뇌사추정자 신고제라는 마중물을 통해 변화의 물꼬를 튼 것처럼 뇌사 장기 기증의 확대를 위해선 다른 수단의 도입을 고려할 시기라는 것.
황정기 병원장은 "인식의 변화는 제도에 의해서도 바뀌지만 교육과 홍보를 통해 의식이 먼저 바뀌고 제도가 뒤따라오는 경우도 많았다"며 "먼저 의료진들부터 장기 기증의 숭고한 정신에 공감해야 환자와 보호자를 설득할 수 있기 때문에 의료진을 대상으로 하는 원내 교육과 홍보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외에도 장기 기증 희망 등록금을 모금하고 기증자의 사연들을 모아 포스터로 제작하고 전시하기도 한다"며 "뇌사추정자 신고 의무화가 처음 시작할 때는 허들이었지만 의료진들이 공감하면서 적극 동참하고 결국 수혜자에게도 혜택으로 돌아간 것처럼 모두에게 효용이 되는 방향으로 노력을 경주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장기 이식은 환자의 삶을 구하는 마지막 수단인 만큼 공여자, 의료진, 보호자 모두 그 헌신과 노력이 반드시 존중받아야 한다"며 "적어도 장기 기증은 모두에게 좋은 것이란 인식이 뿌리내리도록 장기 기증 문화 확산과 제도 개선 방향의 길잡이 역할을 병행하겠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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