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병원경영인사이트]
권미영 노무법인 더원에이치알 변리사
병의원 원장님이 놓치고 있는 가장 치명적인 우발채무 ─ 퇴직연금
수많은 병의원 노무 실무를 관리하면서 공통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현상이 있다. 병의원 원장님들이 진료를 통해 창출되는 현금 흐름, 절세, 그리고 병원의 자산 증식에는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 반면, '직원들의 몫', 즉 노동법적인 채무인 퇴직연금은 방치하는 경영 방식이다.
"퇴직연금은 은행에 맡겨 놓았으니 안전한 것 아닌가요?"라며 대부분의 원장님들이 항변하시지만, 안타깝게도 퇴직연금을 관리하는 금융기관들 중 병의원의 정확한 노무 실태를 반영해 이를 운영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에 지난 십수 년간 수많은 병의원 퇴직연금을 관리해 왔으며, 특히 최근 병의원 원장님 사후 관리되지 않은 퇴직연금이 상속과 맞물려 야기되는 후폭풍을 변호사와의 협업을 통해 직접 경험해 본 입장에서 현장에서 간과되고 있는 '병의원의 퇴직연금 리스크'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1. 50억 원의 우발채무 : 상속 개시와 함께 현실화된 노무 리스크
모 지역 내 요지에 10층 규모의 건물을 소유하고 대형 병원을 운영하던 A원장님이 계셨다. 실제로 A원장님은 해당 지역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유명 인사였다. 그러나 A원장님이 급작스러운 유고를 맞이 하면서 A원장님의 병원은 급격히 흔들리기 시작한다.
우선 A원장님 유족들은 천문학적인 상속세 부과에 직면했다. 자산의 포트폴리오가 A원장님 명의의 부동산에 극단적으로 편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상속인들은 당장의 세금 납부를 위한 현금 유동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요 자산을 급매로 처분해야만 했다.
그러나 실질적인 타격은 세금 문제가 수습될 무렵 발생했다. 병원에 재직 중이던 의사와 직원 등 100여 명이 단체로 집단 노무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소송의 핵심 쟁점은 '퇴직연금 과소 적립'이었다. 생전에 원장님이 적법하게 적립해 왔다고 인지했던 금액이, 실제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이 규정하는 법정 기준액에 현저히 미달한다는 취지였다.
초기 소수의 인원으로 시작된 소송은 병원 내부의 정보 공유를 통해 급격히 확산되었고, 최종 청구 금액은 50억 원에 달했다. 그러나 문제는 상속인 중 병원의 노무적, 재무적 흐름을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 전무했다는 점으로부터 출발했다.
상속인들은 당연히 금융기관에 맡겨둔 퇴직연금이 적법하게 산정되고 있을 것이고, 이는 원무팀 직원들이 알아서 잘 관리하고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맹신이 화를 키운 것이다. 심지어 병원 행정 실무를 총괄하던 원무 핵심 인력마저 소송에 가담하면서 병원 측은 최소한의 방어 논리조차 구축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부동산 매각으로 이미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고 있던 유족에게 50억 원의 노무 우발채무는 감당 범위를 초과한 것이었다. 얼핏 이 사건을 극단적인 사례로 보이지만, 실제 사건이며, 외형 확장에만 치중하느라 퇴직연금 관리를 방치하고 있는 수많은 병의원이 현재진행형으로 안고 있는 보편적인 리스크이기도 하다.
실제 해당 사건을 방어했던 변호사는 퇴직연금에 특화된 본 노무사의 도움으로 청구액의 80% 이상을 방어하는 법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자금 경색은 해결되지 않았다. 상속인들로서는 법원이 인정한 최소한의 지급액조차 당장 융통할 현금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2. 퇴직연금제도의 본질 ─ 시혜적 복지가 아닌 강행법규상 채무
이러한 리스크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서는 원장님들의 관점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 노동법 체계에서 퇴직급여는 사용자가 제공하는 시혜적 성격의 보너스가 아니다. 이는 근로기준법 및 퇴직급여보장법 등 노동법령에 의해 사용자에게 강제되는 엄격한 '법적 강행 의무'이기 때문이다. 동거 친족 등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근로자를 1인 이상 사용하는 모든 사업장에는 예외 없이 이 의무가 부과된다.
현재 법에서 허용하는 퇴직급여 제도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된다. 우선은 퇴직금제도다. 근로자 퇴직 시 사용자가 일시금으로 지급하는 형태로, 외부 적립 없이 장부상 부채로 기록된다. 운용은 단순하나 병원의 현금흐름이 악화될 경우 지급불능 사태로 직결되는 높은 재무적 불안정성을 띤다.
확정급여형(DB형) 퇴직연금도 있다. 근로자가 수령할 퇴직급여액이 사전에 확정되며, 사용자는 운용 결과와 무관하게 약정된 급여를 100% 보장해야 할 법적 책임을 진다.
근로자에게는 안정적이나, 병원 입장에서는 장기적인 재무 부담과 금리 인하에 따른 운용 손실 리스크를 떠안아야 한다. 현재 가장 많이 활용되고 있는 것은 확정기여형(DC형) 퇴직연금이다. 사용자가 매년 연간 임금총액의 12분의 1 이상을 근로자 개별 계좌에 납입하면 일차적 책무가 종료된다.
운용의 책임은 근로자에게 귀속되므로, 병원 입장에서는 재무적 변동성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객관적 장점이 있다. 비교적 최근 도입된 중소기업퇴직연금기금제도도 있다. 소규모 사업장의 운용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다수의 사업장이 기금을 공동 조성하고 전문 기관이 운용하는 방식이다.
대부분의 병의원은 이 중 하나를 채택하고 있으나, 실무상 리스크는 '제도의 도입 여부'가 아닌 '적법한 산정 및 운영 여부'에서 발생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병의원은 퇴직연금을 단순 금융 상품으로 간주하여 은행이나 증권사에 일임하는 경향이 짙다.
그러나 금융기관은 자금 운용의 주체일 뿐, 병원의 복잡한 각종 수당과 임금 체계를 분석해 '평균임금'을 산출할 노무적 전문성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 결과 연금 산정의 모수가 되는 임금의 범위가 축소되어, 과소 적립이라는 치명적인 법적 결함이 수년간 방치되는 것이다.
-하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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