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칼타임즈=김민건 기자] 연구비 한 푼 없던 신약 후보물질이 글로벌 항암제로 성장하기까지 10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 과정에는 우연한 만남과 연구 실패, 글로벌 경쟁약의 등장, 개발을 계속할 것인지를 둘러싼 고민이 있었다.
국산 항암신약 '렉라자'(레이저티닙)의 개발을 이끌어온 조병철 연세대 의대 종양내과 교수가 돌아본 여정이다.
그러나 조 교수는 렉라자 성공 자체를 강조하지 않았다. 이 다음의 성공을 위해서는 우연에 의존했던 개발 방식을 바꿔야 한다고 했다.
조 교수는 13일 오전 더그랜드롯데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2026 코넥트 임상시험 국제 콘퍼런스'에서 '렉라자와 그 너머: 한국 신약 임상개발의 미래'를 주제로 기조강연에 나서 렉라자 개발 과정과 한국 신약개발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그는 "렉라자는 한 사람이나 한 기업이 개발한 신약이 아니다"라며 "바이오텍과 학계, 제약산업, 중개과학이 융합해 만들어낸 성공 사례"라고 평가했다.
이어 "다음 성공은 적절한 사람들이 우연히 만나는 것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며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개발까지 지속적인 협업이 이뤄지는 생태계 구축을 주문했다.
연구비 없던 첫 만남…거절된 연구 제안이 새로운 기회로
렉라자 개발의 출발점은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조 교수가 이끌던 연구팀은 규모가 작았다. 한국에서 글로벌 항암제를 개발한다는 목표는 요원해 보였지만, 연구진은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환자에게 도움이 될 치료제를 만들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노스코의 고종성 박사가 조 교수를 찾아왔다.
고 박사는 조 교수 연구팀이 발표한 EGFR-TKI 내성 표적 치료제 관련 논문을 읽고 미국에서 직접 찾아왔다. 그가 제안한 물질은 'GNS-1480'이었다.
과학적으로 흥미로운 후보물질이었지만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다. 조 교수는 당시 고 박사에게 "연구를 진행하기 위한 자금이 얼마나 있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결국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짧게 끝났다. 조 교수는 "우리는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졌다. 당시에는 두 사람 모두 이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지 못했다"고 했다.
다시 기회가 찾아온 것은 2년 뒤였다.
2015년 조 교수는 3세대 EGFR-TKI 내성 연구를 위한 연구비 지원 제안서를 제출했지만 탈락했다. 그런데 심사위원 가운데 유한양행 관계자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예상하지 못한 초청을 받게 됐다.
유한양행을 방문한 조 교수는 낯익은 후보물질을 발견했다. 2년 전 고종성 박사가 소개했던 GNS-1480이었다. 그사이 후보물질은 유한양행에 기술이전됐고 YH25448이라는 새로운 개발명을 얻은 상태였다.
조 교수는 "처음에는 실패처럼 보였던 일이 새로운 기회로 이어졌다"며 "같은 물질을 다시 만났지만 이번에는 개발을 진행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돼 있었다"고 설명했다.

두 번째 만남 이후 연구는 본격화됐다.
조 교수 연구팀은 실험실 연구에서 강력한 항종양 활성과 뇌 침투력, 고무적인 비임상 안전성 결과를 확인했다. 해당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Clinical Cancer Research'에 발표됐고, 이후 임상개발을 추진하는 과학적 근거가 됐다.
다음 과제는 실제 환자에게서 효과를 확인하는 일이었다.
초기 임상인 LASER201에서는 종양 크기가 감소하고 환자의 증상이 빠르게 개선되는 사례가 나타났다. 조 교수는 특히 2017년 6월부터 치료를 시작해 7년 이상 같은 용량으로 투여를 이어간 환자의 사례를 소개했다. 그는 "신약개발의 의미는 환자에게 더 많은 시간을 주고 오래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데 있다"고 말했다.
이후 초기 임상연구에서는 객관적 반응률(ORR) 54%가 확인됐고,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The Lancet Oncology'에 발표됐다.
개별 환자에게서 관찰됐던 가능성이 재현 가능한 임상 근거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유망한 초기 성과가 신약개발의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았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경쟁약인 아스트라제네카의 타그리소(오시머티닙)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타그리소의 국내 급여 적용 등으로 치료 환경이 변하면서 렉라자 임상시험의 환자 모집도 어려워졌다. 초기 임상에서 고무적인 결과를 얻었지만 국제학회에서 충분한 주목을 받을 수 없었다.
조 교수는 당시 개발을 중단해야 한다는 메시지까지 받았다. 이 시점에서 개발팀이 마주한 질문도 달라졌다. 더 이상 '이 약물이 효과가 있는가'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도 개발을 계속할 길이 남아 있는가'를 판단해야 했다.

2018년 얀센 기술이전이 전환점…글로벌 3상과 병용요법 확대
렉라자가 중요한 전환점을 맞은 것은 2018년 11월이었다. 유한양행이 얀센과 최대 12억5000만 달러 규모의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한 것이다.
조 교수에게 이 계약은 단순히 대규모 기술이전 성과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그는 "우리는 렉라자를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글로벌 제약기업도 이 후보물질을 믿는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글로벌 파트너십을 확보하면서 렉라자의 개발 전략도 한 단계 확장됐다.
유한양행과 국내 연구진은 치열한 경쟁에도 불구하고 렉라자를 1차 치료제로 개발하기 위한 글로벌 임상 3상 LASER301 연구를 추진했다. 조 교수는 "우리의 목표는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 환자를 위한 의약품을 개발하는 것이었다"고 강조했다.
LASER301 연구에서 렉라자는 EGFR 변이 비소세포폐암 환자의 1차 치료에서 게피티닙 대비 유의미한 무진행생존기간(PFS) 개선 효과를 보였다.
이를 바탕으로 렉라자는 2023년 6월 국내에서 1차 치료제로 승인받았다. 한때 글로벌 경쟁에서 뒤처질 수 있다는 우려를 받았던 후보물질이 새로운 치료 선택지로 자리 잡은 것이다.
개발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2018년 얀센과의 파트너십은 EGFR·MET 이중특이항체인 리브리반트(아미반타맙)와 렉라자를 병용하는 새로운 개발 전략으로 이어졌다.
두 치료제를 결합해 보다 우수하고 지속적인 질환 조절 효과를 확보하려는 접근이었다. CHRYSALIS와 CHRYSALIS-2 등 초기 임상연구를 거쳐 글로벌 임상 3상 MARIPOSA 연구로 개발이 확대됐다. MARIPOSA 연구는 EGFR 변이 비소세포폐암의 1차 치료에서 리브리반트·렉라자 병용요법과 타그리소를 비교한 연구다.
병용요법은 2024년 8월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으며, 후속 전체생존기간 분석에서는 타그리소 대비 사망 위험이 25%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HR 0.75).
조 교수는 이러한 성과가 글로벌 파트너십의 의미를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한국에서 개발한 의약품을 해외로 이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글로벌 제약기업과 협력해 새로운 치료 전략을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그는 렉라자 개발 과정을 세 주체의 상호보완적인 역량이 연결된 결과로 설명했다. 바이오텍은 후보물질을 발굴했고, 학계와 병원은 과학적·임상적 근거를 구축했다. 제약기업은 개발을 지속할 수 있는 역량과 글로벌 진출의 기반을 제공했다.
조 교수는 "어느 누구도 이 여정을 혼자 완성할 수 없었다"며 "후보물질에 대한 믿음과 연구에 대한 열정, 도전할 용기, 무엇보다 사람들이 함께 협력한 것이 렉라자를 가능하게 했다"고 강조했다.

"한국 병원, 신약 시험하는 곳 넘어 개발 출발점 돼야"
문제는 렉라자의 성공을 어떻게 다음 신약개발로 이어갈 것인가다.
조 교수는 렉라자를 가능하게 했던 협력 가운데 일부가 우연한 만남에서 시작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제노스코 고종성 박사와의 만남부터 연구비 지원 제안 탈락이 유한양행과의 협력으로 이어진 과정까지, 서로 다른 주체들이 연결된 데에는 우연한 계기가 있었다.
하지만 차세대 렉라자 개발까지 우연에 맡길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이를 위해서는 신약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개발까지 연구자와 기업을 연결하고, 협력을 지속적으로 뒷받침하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특히 한국이 보유한 병원과 임상시험 인프라를 신약개발을 주도하는 역량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한국은 환자가 집중된 대형병원과 숙련된 의료진, 풍부한 임상 데이터와 검체를 보유하고 있다. 임상시험을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기반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글로벌 제약기업과 중국 바이오텍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는 이러한 강점만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조 교수는 "한국의 다음 경쟁력은 임상시험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데서만 나와서는 안 된다"며 "신약개발의 과학적인 방향과 전략 자체를 수립하고 주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서는 임상적 가설 설정부터 환자군 선정, 용량 최적화, 병용요법과 임상시험 설계에 이르기까지 개발 전략을 직접 결정할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
바이오마커와 환자 검체 연구를 통해 어떤 환자가 치료 혜택을 얻는지, 내성은 왜 발생하는지, 다음으로 무엇을 검증할 것인지도 판단해야 한다.
조 교수는 이러한 역할의 중심에 국내 대형병원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병원이 단순히 글로벌 제약사가 개발한 신약의 임상시험을 수행하는 장소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병원은 새로운 의약품을 시험하는 장소를 넘어 차세대 렉라자 개발이 시작되는 곳이 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으로는 물리적·인적·디지털 인프라를 제시했다. 먼저 임상현장과 밀접하게 연결된 중개연구 조직과 바이오뱅크가 필요하다. 실제 환자의 치료 과정에서 확보한 검체와 정보를 실험실 연구에 활용하고, 연구 결과를 다시 임상개발에 반영할 수 있는 체계다.
인적 인프라도 중요하다. 의사과학자를 양성하는 것뿐 아니라 이들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도록 보호된 연구시간과 전담 연구팀을 지원해야 한다.
디지털 인프라로는 AI 기반 멀티모달 플랫폼 구축을 제안했다. 임상기록과 유전체 데이터, 환자의 치료 결과를 통합해 내성 기전과 바이오마커를 분석하고, 환자 선정 및 치료 표적 발굴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조 교수는 자신의 연구실에서도 환자 유래 폐암 오가노이드와 종양 이종이식 모델, 단일세포 RNA 분석 등을 활용해 임상현장에서 제기된 질문을 신약개발과 연결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어떤 환자가 치료에서 가장 큰 혜택을 얻을지, 치료가 효과를 잃는 이유는 무엇인지, 어떤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해야 하는지를 환자 기반 연구를 통해 규명한다는 설명이다.
나아가 이러한 정보를 다시 실험실로 가져와 신약개발에 활용하는 역중개연구(Reverse Translation)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임상시험 설계 방식도 달라져야 한다고 봤다. 조 교수는 유럽의 PIONeeR 연구를 사례로 제시했다. 면역항암제 치료 후 질환이 진행한 폐암 환자를 대상으로 여러 병용요법을 평가하면서, 사전에 설정된 의사결정 기준에 따라 가능성이 낮은 치료군을 조기 중단하고 새로운 치료군을 추가하는 접근이다.
그는 "한국의 목표는 단순히 임상시험을 더 빠르게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무엇을 중단하고, 무엇을 계속 개발하며, 다음에 무엇을 검증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임상시험을 설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더 많은 후보물질보다 성공 반복할 시스템이 중요"
조 교수는 강연을 마무리하며 한국 신약개발의 미래를 위한 세 가지 우선과제를 제시했다.
첫째는 심층 과학 연구와 역중개연구다. 환자 유래 연구모델과 멀티오믹스, AI를 결합해 실제 환자에게서 얻은 정보를 다시 신약개발에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스마트 임상시험 설계다. 바이오마커 연구와 적응형 임상시험 설계를 개발 초기부터 적용해 임상 근거에 따라 전략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셋째는 협력적 리더십이다. 바이오텍과 대학, 병원, 제약기업이 후보물질 발굴부터 글로벌 임상개발까지 연결된 협력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의미다.
국내 기업들이 개발 중인 항체약물접합체(ADC)와 이중특이항체, 표적단백질분해 기술 등 차세대 신약 분야에서도 이러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봤다.

조 교수가 강조한 지속 가능한 신약개발 생태계 구축과 관련해 정부도 연구개발과 임상시험 지원 확대에 나서고 있다.
이날 기조 토론에 참석한 성창현 보건복지부 보건산업정책국장은 2026년 복지부 R&D 규모가 1조원을 넘어섰으며, 정부 전체 바이오헬스 분야 R&D는 약 2조7000억원으로 추산된다고 밝혔다.
정부는 AI 기반 신약개발 플랫폼과 국가바이오빅데이터 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후보물질 발굴부터 임상개발까지 AI를 활용하는 연구와 자동화 실험실인 '셀프드라이빙랩' 구축을 지원 중이다.
임상개발 자금 지원도 확대할 계획이다. 성 국장은 올해 7호 펀드와 임상 3상 특화펀드를 새롭게 조성하면 관련 펀드 규모가 총 9500억원대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했다. 아울러 국민성장펀드와 연계해 초기 임상 단계의 자금 지원을 원활하게 하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성 국장은 현재 AI 신약개발 관련 사업들이 개별적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며, 정부 투자뿐 아니라 민간과의 협력체계 구축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R&D 투자 규모 역시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평가하며 추가적인 투자 필요성을 인정했다.
결국 렉라자의 성공을 반복하려면 새로운 물질을 발굴하는 것만큼이나, 개발 과정에서 과학적인 의사결정을 내리고 이를 지속적으로 뒷받침할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
조 교수는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더 많은 신약 후보물질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을 반복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라며 "오늘 하나의 성공적인 임상시험을 수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앞으로 글로벌 신약개발을 주도해야 한다"고 했다.

- 최신순
- 추천순
댓글운영규칙ex) medi****** 아이디 앞 네자리 표기 이외 * 처리
댓글 삭제기준 다음의 경우 사전 통보없이 삭제하고 아이디 이용정지 또는 영구 가입이 제한될 수 있습니다.
1. 저작권・인격권 등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
2. 상용프로그램의 등록과 게재, 배포를 안내하는 게시물
3. 타인 또는 제3자의 저작권 및 기타 권리를 침해한 내용을 담은 게시물
4. 욕설 및 비방, 음란성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