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의권 쟁취 투쟁 당시 전공의들 사이에 많은 관심을 끌었던 이슈 중의 하나가 바로 ‘전공의 노조’ 설립, 혹은 ‘의사 노조’ 설립이었음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당시에 가졌던 대한 전공의 협의회의 대정부 협상력 및 직역간의 이해 조정 역할 등은 전공의들로 하여금 향후 전공의 노조 설립의 가능성을 점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투쟁이 끝나고 모두 일상 생활에 매몰되어 바쁜 병원 생활 속에 살면서 ‘전공의 노조’란 문제는 잠시 관심밖에 있다가 최근 제7기 대한 전공의 협의회의 출범과 함께 다시 수면위로 부상했다.
이 민감하고도 미묘한 이슈에 대해 ‘전공의 노조가 과연 필요한가?’, ‘전공의 노조가 나에게 무슨 일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라는 기본적인 의문을 던지면서 논의를 시작해본다.
우리에게 왜 ‘노조’가 필요한가?
한국 사회에서 ‘노동 조합’이라는 단어가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고 할 수 있다. 대다수의 국민들과 전공의들에게 ‘노조’란 단어는 ‘파업’ 또는 ‘임금 협상’ 등의 단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되고 ‘전공의 노조’란 단순히 ‘임금 인상을 위한 강력한 조직체 건설’이라는 의미로만 다가오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고정관념 때문에 ‘노조’라는 개념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분들도 많을 것이다. 특히 전공의들의 경우에는 의사라는 직업적 자긍심 때문에 이러한 개념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노조는 사용자측을 대상으로 피고용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고 불이익에 대해 대응하는 피고용자들의 대표기구로 단체행동, 임금 협상 등을 통해 이를 실현한다. 따라서, 개별 단위노조들은 주로 고용상의 불이익이나 임금 교섭 등과 같은,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활동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 계층으로 불리는 피고용인들의 단체이익 대변 및 보호라는 구호아래 강력한 기반을 갖춘 이익 집단 혹은 압력 집단으로 최근에는 정치, 사회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중앙연합체를 구성하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노조의 위상을 고려해 볼 때 전공의 노조가 구성된다면 다음과 같은 의미를 갖게 될 것이며 이것이 곧 전공의 노조의 필요성에 대한 다른 표현이 될 수 있다.
첫째, 그간 암묵적으로 실체를 인정받았을 뿐, 직역 대표 조직으로서 법적 존재 근거를 갖지 못한 일종의 친목조직 형태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전공의 협의회에 법적 존재 근거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
이는 곧 각 병원 사정에 따라 조직 구성 자체가 힘든 많은 병원들에서 전공의들이 원할 경우 이해를 대표할 수 있는 조직이 구성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둘째, 이전의 협의회 체제로는 전공의들이 엄연히 피고용자로서 적절한 근로시간에 대한 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의료계 특유의 도제관계 혹은 전공의들의 애매한 신분(기타 의료 인력에 대한 감독자이자 피고용자) 때문에 경영진 측과 적절한 교섭을 갖는 데 많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으나 노조 설립 이후에는 법적 근거를 갖는 정식 조직을 구성함으로써 교섭의 정례화 및 교섭 결과에 대한 법적 구속력을 갖추게 되는 실질적 의미의 권한이 부여받을 수 있다.
이는 전공의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실질적인 힘을 전공의 대표기구가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며 개별 전공의 대표기구들을 실질화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전공의 노조는 비교적 젊은 연령의 고도의 전문성을 갖추고 있는 의사들의 조직이므로 사회 통념상의 ‘노조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의료계의 파업 이전까지는 전공의들은 높은 직업적 전문성 및 자긍심을 바탕으로 젊은 연령대의 피고용자라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사회의 상류계층 또는 지도계층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단순히 임금 혹은 처우 개선에만 치중하는 조직에 대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데에 실질적으로 많은 거부감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파업 이후 스스로의 한계에 대해 어느 정도 자각하게 됨으로써 전문직의 권위 확보나 자긍심의 유지, 사회적 인정 등은 적극적인 사회참여나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기여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2000년 투쟁 당시 전공의들이 외쳤던 구호가 ‘교과서적인 진료’, ‘참의료의 실현’ 등이었고 이에 대한 전공의들의 열성적인 지지는 이러한 자각과 전공의들의 염원을 반영한 것이었다.
따라서 전공의 노조는 이러한 전공의 집단의 자각을 바탕으로 사회적 영향력 행사와 기여를 하는 조직으로써 정식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며, 실질적으로 정부와의 교섭을 통해 의료 제도의 불합리한 왜곡을 견제할 수 있는 강력한 조직으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가장 진료의 최일선에서 환자들을 대하면서 그들의 애환을 알고 있는 전공의들만이 잘못된 의료 제도가 환자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줄 수 있는지 파악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 기존 노조집단들이 단순히 단체 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이나 영향력을 키워 온 것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보건 의료 발전을 위해 많은 분야에서 사회적 기여와 영향력 확보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공의 노조가 나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가장 실질적이며 개별 전공의들에게 가장 와 닿는 질문일 것이다. 실제로 바쁘고 과중한 업무로 인해 최소한의 수면시간도 보장받지 못하는 전공의들에게 전공의 노조에 대한 논의는 일견 뜬 구름과 같은 개념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전공의 노조가 조직된다면 개별 전공의들의 이해가 침해될 경우 이에 대한 교섭 및 조정은 노동법에 명시된 대로 진행되게 될 것이므로 법적 구속력에 의해 강력히 조정될 것입니다. 이는 과도한 근무시간, 열악한 근무환경, 열악한 임금 등 현실적인 문제를 다룰 때 특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실질적인 권한과 실체를 가진 대표기구를 가짐으로써 교육수련 과정에 대한 개선 및 유지 보수에 대해 실질적으로 교섭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는 교섭과정에서 교육수련 과정의 질 유지 및 개선에 대해 연계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
많은 전공의들이 자신의 영달만을 목표로 힘든 수련을 견디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의 사회에 대한 기여 욕구를 실질적으로 끌어내어 참여시키는 많은 활동들이 노조라는 조직을 통해 좀더 구체적인 형태로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노조 설립’을 하고 노조 활동‘을 하기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많은 분들이 이미 짐작하고 있으실 것이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이런 한국 사회의 시각과 여건을 알면서도 전공의들이 노조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현재의 전공의 수련 실태 또한 우리는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굳이 ’노조‘란 명칭이 아니어도 좋다. 우리에게는 지금의 협의회 조직을 뛰어 넘는, 좀더 강력하고 법적 근거를 가진 조직이 필요하며 이를 통해서 개별 전공의들의 올바른 수련 환경을 확보하고 나아가서 한국 의료 사회를 변화 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전공의 노조가 자칫 전공의들의 파업 그리고 임금 인상만을 노리는 이익 집단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전공의 노조는 누구보다 한국 의료계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는 집단으로 무리한 요구보다는 오히려 의료계 전체를 단합시켜 정부에 대해, 올바른 진료를 할 수 있고 또한 그러한 진료에 대한 정당한 댓가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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