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생활 수십년간 요즘처럼 슬픔과 기쁨, 애환과 감동이 혼합됐던 적이 있었을까. 아마 앞으로도 이런 경험은 없을 것 같다. 아니, 없어야 한다. 두번 반복돼선 안 될 일이다.
내가 근무하는 건양대병원은 대전지역 첫 메르스 확진 환자가 발생하면서 주목을 받았다.
이어 수간호사가 의심환자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는 과정에서 메르스에 감염되면서 국민들을 다시 한번 놀라게 한 병원이기도 하다.
황원민 교수가 진료에 앞서 방역복을 입은 모습
메르스 확진 환자가 처음 발생했을 때의 당혹스러움은 지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수간호사의 감염 사실을 확인했을 때에는 전쟁터에서 전우를 잃은 듯 침통했다. 함께 했던 후배 간호사들은 눈물바다가 됐다.
평소 간호사 등 직원들과의 관계가 나빴던 것은 아니지만 요즘처럼 전우애를 느끼며 하나로 뭉쳤던 적은 없었다.
뜻밖의 상황에 감염내과 의료진 상당수가 격리조치 되면서 의료진 지원자를 구해야 하는 상황이 됐을 때 내과 전공의들이 서로 나서는 모습에선 덩달아 피가 뜨거워졌다.
귀하게 자랐을 것만 같았던, 자기만 알 것 같았던 전공의들이 "교수 혹은 선배들이 격리되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겠느냐"며 나설 것이라고는 예상못했다. 감동적이라는 표현은 아마 이런 순간에 쓰라고 있는 것이리라.
가장 놀라운 것은 의료진을 바라보는 환자들의 시선이다. 의사로서 이처럼 진심어린 격려를 받아본 적이 있었던가.
검사를 해야 한다면 돈 벌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식의 시선을 보내기 십상이던 환자들이 우리를 '의사 선생님'이라고 불러주고 따뜻한 눈빛을 보내주는 광경이라니. 머릿 속에서만 그려왔던 모습이 현실로 이뤄지고 있는 순간이다.
황원민 교수
얼마 전에는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가 "의사 선생님들이 수고가 많다"며 수박을 들고 찾아와 놀라게 하더니 몇일 전에는 이온음료 한박스가 도착했다.
언론에서 방역복을 입고 진료를 하다보면 탈수증세를 보인다는 얘길 듣고 이온음료를 마시고 힘내라며 보낸 것이다.
심지어 병원과 전혀 무관한 여성이 "의사, 간호사도 누군가의 아빠이고 엄마가 아니냐. 힘내라"라는 내용의 쪽지와 함께 현금 10만원을 병원으로 들고 찾아왔을 땐 가슴이 뻐근해졌다.
비싸고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수고가 많다. 끝까지 버텨달라. 우리는 당신들을 믿고 있다"라는 그들의 진심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다.
몇일 전에는 초등학교 2학년 학생이 보낸 택배가 도착했다. 박스 안에는 "용돈을 모아 작은 선물을 준비했으니 더 힘내서 메르스를 이겨달라"고 적힌 그림 엽서와 함께 과자와 생필품이 가득했다.
초등학생이 의료진에게 보내온 그림 엽서
그동안의 피로감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어떤 의료진이 힘을 내지 않을 수 있을까. 메르스는 그렇게 나를 울리고 웃겼다.
하지만 메르스 사태가 이렇게 끝날까봐 벌써부터 걱정이다. 메르스가 남긴 과제는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가 초기대응을 잘 했더라면 이렇게 확산되지는 않았을 것이고 메르스 의심환자 및 확진환자와 밀접접촉하는 의료진에게 C급 방역복을 제공했다면 수간호사는 감염에 노출되지 않았을 것이다.
무작정 대형 대학병원을 선호하는 국민들의 인식은 삼성서울병원 응급실 과밀화을 초래했고 이는 메르스 사태에서 슈퍼 전파자를 양산했다.
이번 만큼은 세월호 사태 이후와는 달라야한다. 국회의원 말장난으로 끝나면 제2 제3의 메르스 사태는 막지 못한다. 방역 체계를 재정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았으면 하는 게 메르스와 사투를 벌인 의료진의 한명으로서의 바람이다.
* 이 글은 건양대학교병원 황원민 내과 교수와의 인터뷰를 정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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